한국장애인직업재활시설협회는 매년 장애인 고용 촉진 및 장애인식개선을 위해 ‘장애인직업재활시설 근로체험 수기’를 공모하고 있다.

2019년 공모에는 34건의 수기가 접수됐고 심사결과 총 27편의 입상작이 선정됐다. 이중 대상 1편, 최우수상 2편, 우수상 10편을 연재한다. 열세 번째는 우수상 수상작 “함께 가는 내일 ”이다.

함께 가는 내일

허유승(일배움터 사원 허혁준 父)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아들놈이 퇴근하면서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들고 왔다. 아마 작년처럼 직장에서 사 왔을 것이다. 내 아들의 이름은 혁준이고 자폐성장애 2급의 진단을 받았지만 남들처럼 어엿이 ‘일배움터’라는 직장이 있고 출퇴근버스를 탄다.

‘일배움터’는 중증장애인과 함께 하는 사회적기업으로, 일상생활 및 직업사회적응훈련, 재활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역사회 안에서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업이다.

건조농산물을 판매하고, 도자기공방과, 화훼사업, 그리고 플로베라는 카페를 운영하는데 내 아이는 건조농산물 ‘탐라지오’를 만들어 파는 농산물팀에 속해서 10년 가까이 월급을 받아 오고 있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겠지만 우리도 퇴근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그의 하루를 읽는다. 서른두 살 아이의 표정은 밝고, 하루가 편안했음을 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발달장애 가족의 30년은 있다.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기다렸던 아이를 정작 세상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아이는 성(城)처럼 두텁고 단단한 벽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네 살 무렵까지는 남들처럼 혼자 서거나 걷지도 못하고, 종일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찢고 던지는 아이였다. 커가면서도 “엄마!”라고 부르기는커녕 메아리 같은 반향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식당에 가면 다른 사람의 식탁으로 손이 먼저 가서 우리를 난처하게 했다.

집은 더 이상 쉴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가족애를 기대하며 미래를 꿈꾸는 것도 사치가 되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아이와 씨름하는 동안, 아빠인 나는 전쟁터를 피해 방황했다.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러운 시간을 나는 하느님만 원망했다.

“하느님! 제가 아무리 당신께 잘못을 하면서 살아왔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잘못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 하느님은 시련과 더불어, 함께 할 많은 친구를 주셨다. 아이의 특수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이 헬렌켈러의 설리반과 같은 분이셨다. 관찰일기 등을 통해 가슴속 응어리를 뱉어내게 하더니 나날이 달라지는 아이를 통해 희망을 주고 다시금 꿈을 꾸도록 해주었다.

우리에게도 내일이 생겼고, 아이의 미래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장차 직업탐색과 직업훈련을 위하여 초등학교과정에서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문제행동을 최소화하고 비장애인들과의 사회통합을 위해 학교통합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리라 예견할 수 있었다.

특수학교에서 학생 수가 적은 일반학교에 통합을 했고, 아예 둘이서만 자취를 하면서 독립생활 프로그램을 3년여 동안 실행했다. 집안 살림을 돕다보면 참 많은 훈련이 된다. 소근육운동이 자연스레 되고, 밥상을 옮기면서 평형감각을 익히게 되며, 꼭 알아야 할 개념들이 생활화된다.

동네 아이들과의 어울림은 사회통합의 기초가 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이제 남이 아닌 훌륭한 선생님으로 자리매김 해주었다. 중학생이 되자 다시 집으로 들어와 직업탐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행운이었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어떻게 기회를 준다는 것을 여행 이상으로 가르쳐주는 게 없었다. 하지만 늘 계단이나 비탈길을 무서워하는 아이를 위한 새로운 준비가 필요했다.

다행히 장애와 관련된 책에서 ‘자폐성장애를 가지 아동들에게는 사물이 굴절되어 보이는 시각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훈련에 의해 치료가 가능하다.’는 글렌도만 박사의 글을 읽고, 사라봉이라는 오름의 비탈길을 수개월 동안 오르내렸고 어느새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차에 텐트를 싣고 20여일을 계곡 중심으로 다니기도 하고, 겨울에는 배낭을 지고 다니면서 민박을 하곤 했다. 아이는 훌륭하게 성장해나갔다. 계획했던 이상으로 세상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었다. 더불어 나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눈을 뜰 수 있었다.

학교통합으로 더 이상 특수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게 되자 ‘이화조기교육원’이라는 발달장애아 치료센터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는데, 이 경험은 장애아를 둔 아버지라는 현실과 맞물려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으로 합리화 되었다.

결국 나는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과에서 석사과정에서 정신지체를 전공하고는 역시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이효신 교수님 밑에서 정서행동장애아교육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우리 장애아부모들을 비롯하여 근무하는 학교에서의 도움이 컸다. 무엇보다도 장애를 가진 아들이 아버지에게 준 선물이었다.

고등학교는 특성화고의 원예학과로 진학하고 본격적으로 직업훈련의 기회를 갖게 하였다. 도자기 공방에 다니고, 제빵 기술을 배우는 기회도 가졌으며, 레스토랑에서 서빙훈련도 하였다. 통합준비를 위해 진학한 전문대학에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게 된 것도 우리 아이에게는 스팩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시내외버스 타기가 가능하게 되었고, 서울까지 가서 지하철타기 훈련을 하는 동안 어느새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방해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일배움터’에 와서 2년여의 훈련기간을 보낸 뒤 이제는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게 되었다. 아들이 이렇게 급성장을 하는 동안 아버지인 나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현직에서 명예퇴임을 하고 제주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필수적으로 ‘특수교육학개론’을 이수해야 하는 예비교사들을 위한 강의가 제주대학교에서는 내 몫이 되었다. 난 그들이 장차 학교에 나가 만나게 될 장애아이들과 부모들을 위해서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 가를 이야기하며 그들의 가슴속으로 다가간다. 더불어 사회통합을 위한 비장애아 교육을 부탁한다. 어느덧 학생들은 멀티플레이어 교사로 거듭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아이는 첼로를 배워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하음앙상블’의 식구가 되었다. ‘하음앙상블’은 제주도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장애인식개선 연주를 하고 있는데, 이들의 연주 때 내가 진행을 맡으면서 장애인식개선 강의를 함께 하고 있다.

더불어 연주를 직업으로 하는 일자리창출을 위하여 동분서주 하고 있다. 이제 강연이나 강의는 내 일상이 되어버렸고,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주최한 우선구매 공공기관 워크숍에서 우리 아이들의 물건을 우선 구매해달라는 강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면서 바쁘지만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장애아이를 키워 오면서, 힘들었지만 더없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왔고 아이 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왔다. 다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하는 꿈이 있다. 아이도 자기의 가정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에게 기회를 줄 것이고, 내면에 감춰져 있는 ‘사랑’의 감정을 꺼내어 그 개념을 학습시키고, 애정표현을 훈련하도록 그 장(場)을 마련해 나가리라. 함께 하며 언제까지나 함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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