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직업재활시설협회는 매년 장애인 고용 촉진 및 장애인식개선을 위해 ‘장애인직업재활시설 근로체험 수기’를 공모하고 있다.

2019년 공모에는 34건의 수기가 접수됐고 심사결과 총 27편의 입상작이 선정됐다. 이중 대상 1편, 최우수상 2편, 우수상 10편을 연재한다. 열두 번째는 우수상 수상작 “주홍글씨”이다.

“주홍글씨”

송인희

새벽 다섯 시,

이젠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자동적으로 눈이 뜨인다.

‘어제와 다른 오늘, 그래 시작이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직장생활의 분위기가 좌우될 수 있기에 아침엔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생각을 하면서 출근을 준비한다.

내가 이곳에 몸담은 지 15년.. 사회생활을 처음하게 된 곳이라 처음엔 조직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무지하게 힘들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다독이면서 지금껏 다니고 있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이란 속담이 있는데, 내가 그렇다. 마치 날보고 만든 말 같다. 첫돌 무렵 감기를 심하게 앓고 난 뒤 다리에 힘이 없는 것 같아 병원에 가니 고칠 수 없다는 말을 하더란다. 그렇게 난 장애인.. 지체장애 2급이 되었다.

장애인이다 보니 결혼은 아예 포기하고 어린 시절부터 글 쓰는 게 좋았던 나는 자칭 시인이라 생각하면서 문학도로 방향을 정하고 그 생활에 익숙했다. 글을 쓸 때는 장애인이란 주홍글씨가 필요하지 않기에..

집에서는 그런 나를 걱정을 하시면서, 맞선을 보라고 하도 부추겨서 몇 번 맞선자리에 나갔는데 영 아니었다. 내가 좋으면 상대방이 싫다고 하고, 반대로 죽자고 덤비는 사람은 믿을 수 없기에 말이다. 그러던 차에 한적한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농촌을 생각하면 정겨운 곳, 마음의 고향이란 아름다운 이미지만 갖고 있었기에 촌으로 가자는 남편의 말에 콧노래 불러가며 시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새사람이 왔다고 집안 어르신들과 동네분들이 오셨다.

난 당연히 인사를 해야 했지만 시어른들께선 날 부르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들은 내 방에 오셔서 나를 동물원의 동물 보듯이 구경하시곤 했다.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했는지 지금 같으면 항의하며 난리를 쳤을텐데.. 새댁이고 집안의 막내인 나는 속으로 울며 화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암튼 그렇게 시작된 시집살이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지 않았고, 할 수 있는 것 보다 못 하는 것이 많기에 늘 나 스스로와 싸워야했다.

밥을 지으려면 밖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구정물을 모았다 밖에 나가 버려야했는데 누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생활이었다.

“자기야 분가하자. 남들처럼 자기도 회사 다녀 응?”

논이나 밭으로 다니며 농작물이 자라는 모습이 좋다며 만족해하는 남편이니 끝까지 조를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나는 웃음이 사라지고, 몸도 점점 야위어 갔으며, 또... 임신 3개월 만에 아기를 유산으로 잃게 되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시내의 작은 방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도와주는 기쁨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예전엔 몰랐었다. 여전히 휴일엔 시댁으로 일하러 갔지만 그것 또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나의 행복과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남편과 먹은 아침상을 치우려고 막 일어서는데 ‘여보세요. 여기 ㅇㅇ병원 응급실입니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게 왠 날벼락인가.. 아직 남편이 먹다 남긴 국에서 김이 나는데...’ 택시를 몰던 남편은 출근길에 청소차와 정면으로 추돌했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간 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눈물부터 나오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안절부절 했고 정말이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그 후, 두 달의 병원생활에 우리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고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꿈이고 희망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긴 병상 생활 뒤에 퇴원을 했으나 전세방도 병원비 낸다고 처분하고 갈 곳이 없어 막막하게 되었고, 겨우 주변의 도움으로 외곽의 작은 집에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이 늘 부족했고, 남편의 건강회복에 신경을 쓰는 사이, 알게 모르게 카드 몇 장을 돌려막기를 하였고, 어느 사이에 우린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

밤낮으로 전화로 빚을 독촉하고 툭하면 집으로 들이닥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때부터 모르는 전화는 아예 받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시달리던 어느 날이었다.

삼남장애인작업장이란 작은 푯말을 발견하여 전화를 하였고, 면접도 보게 되었다. 구구절절하게 내 사정을 설명하고 일하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다행히도 난 여기에 취직하게 되었고, 남편은 나의 출퇴근길의 동행자가 되어 몇 년을 함께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편은 아픈 몸으로 트럭을 운전하여 매일같이 출퇴근을 시켜줬다. 그런 시간이 추억으로 지나고 지금은 정부에서 지원되는 전동차가 내 발이 되었다.

그렇게 이 사업장에서 15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강산이 바뀐다는 긴 세월동안 정말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살았다. 때로는 동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언쟁을 높일 때도 있었고,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들어 하는 동료를 보며 같이 울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로 다가가 웃어주기도 했다.

사람인데, 더구나 장애인인데, 살아가는 게 왜 힘들지 않았겠는가. 365일 똑같은 날은 없다. 때론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만 바라보고 있는 남편이 있기에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었고, 그렇게 근무하다보니 올 해는 조장이란 직함까지 받게 되었다.

어깨가 무겁기는 하지만 동료들이 많이 도와주고 협조해줘서 정말 고맙고 다행스럽다. 내가 처음 작업장에 첫 발을 들인 그 날.. 다짐했었던 "몸이 허락하는 한 정년까지 꾹 참고 다녀야지..“

지금도 그 때의 다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 사업장과의 인연으로 나의 힘겹고 고단했던 삶이 이제는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되고, 더 나은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꿈도 갖게 되었으며, 나도 당당한 직장인으로서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오늘이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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