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나기 전의 김향숙씨. <요청에 따라 모자이크 처리를 했음>

염소 뿔도 녹인다는 8월 염천 속을 천천히 그리고 약간은 비틀거리면서 한 여자가 걸어 왔다. 챙이 짧은 흰색 벙거지 모자를 벗었는데 짧은 더벅머리였고 왼쪽머리 부분은 덤성덤성한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가로로 길게 난 수술 자국이 보였다.

머리를 다쳤었고 얼마전 피부이식 수술을 하느라고 머리를 깎았다고 했다. 걸음을 잘 걷지 못하는 것은 새로 맞춘 의족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좀 도와주세요." 그의 첫마디는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김향숙(가명 40)씨는 부산진구 범천동에서 아버지 김씨(32년)와 어머니 남씨(34년)사이에서 2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고무공장에 다니셨는데 자주 집을 비웠다. 어머니가 공장에도 다니고 날품팔이도 하는 등 노력했으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먹을 것이 없어서 항상 배가 고팠다. 언젠가 작은언니가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젊은 아줌마가 있었는데 그 집에는 쌀도 많고 연탄도 많더라'고 해서 참 부러웠었다.

어쩌다 집에 오는 아버지는 항상 술이 취해 와서는 어머니와 자녀들을 때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은 오히려 겁이 났다. 아버지가 오는 날은 으레 싸움이 있었는데 싸움이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일방적인 횡포로 어머니을 비롯하여 전가족이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날이었다. 집기들은 던져져서 깨지고 부서지고 가족들은 얻어맞아 울고불고 집안은 항상 난장판이 되곤 했다.

그렇게 매맞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아버지는 있었으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학교에서 친구들이 아버지 자랑하는 것이 제일 부러웠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오지 않는 날은 그런대로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아버지가 오지 않는 날도 집안은 별로 평화롭지 못했다. 형제들끼리도 사소한 일로 다툼이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여상 야간부를 다녔다. 졸업 후 1년쯤 뒤에 해운회사에 타이피스트로 취직이 되었다. 그가 직장생활에 익숙해 질 즈음 큰오빠와 작은언니가 대판 싸웠다. 그는 막내였기에 큰언니와는 10살 이상 차이가 났고 중학생일 때 큰언니는 이미 서울로 시집을 가고 없었기에 큰오빠와 작은언니가 곧잘 싸웠던 것이다.

그가 싸움을 말리다가 유리창이 깨어지면서 왼손을 다쳤다. 왼손의 심줄이 나가서 더 이상 타이프를 칠 수가 없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백화점 점원으로 일을 했으나 집안이 평화롭지 못했기에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집이 싫어서 서울 큰언니에게로 갔다. 제품공장에 실밥 따는 시다로 들어갔다. 그 후 신발공장 등 몇군데로 옮겼고 몇 년 후에는 신발가게를 차렸으나 집세는 비싸고 장사는 잘 안되어 다시 백화점 부식코너에 근무를 했다. 그래도 월급을 받으면 엄마한테 생활비는 보내주었다. 김향숙씨의 삶은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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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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