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황금고리에서 개최한 유시화 시화전에서 왼쪽 첫번째가 장향숙씨.

1989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성분도직업재활원에 입소를 했다. 그 때까지 그에게는 신이 없었다. 신은 걷기 위한 것이었고 그는 걷지 않으므로 당연히 신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재활원에 들어가면서 몸에 맞는 휠체어도 구입하고 신발도 마련했다. 신을 신어야 발이 보호된다는 것이었다. 비용은 교회여전도회에서 마련해 주었다.

당시 재활원에는 7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는데 그는 기계제도나 컴퓨터를 배우고 싶었는데 제도과와 전산과는 고졸이상이라 안되고 도자기과는 몸이 너무 부실해서 안 된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없이 직조공예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염색도 할 수가 없었고 베틀에 오를 수도 없었다. 실로 그림을 짜는 타피스트리(Tapestry)에 매달렸다. 주로 성화 액자를 만들었다.

2년이 지나 졸업을 해도 직업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재활원에서 많은 장애인들을 만났고 장애인들의 현실 그리고 일하고 싶다는 욕망 등 마음이 복잡했다. 8개월만에 수원에 있는 전자조립공장에 들어갔다. 조립에 필요한 나사못을 집어주는 단순 노동이었지만 처음으로 가져 본 직업이고 직장이었다. 그러나 100일만에 24만원을 받고 그만두어야 했다.

그 공장은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보호작업장이었는데 한 달쯤 지나서 사람들과 조금씩 친숙해지자 큰언니라고 이것저것 의논들을 해 왔다.

"성폭행이라고는 안 했으나 내 성질에 가만히 있었겠어요. 그 애들을 지키기 시작하자 어느 날 내가 잠든 사이에 대리란 놈이 술이 취해서 한 아가씨를 덮친 거예요. 내 더러븐 성질에 개지랄을 했지요. 그 개새끼를 당장 내보지 않으면 복지관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복지관에서는 그 대리를 내보내는 대신 '장향숙을 라인에서 빼라' '장향숙을 내보라'는 소리가 공공연히 돌았고 사람들도 슬슬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조립을 하고 남는 납을 누군가가 빼돌려 팔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부정의 고리가 얽혀 있었던 것이리라.

"나 때문에 다른 직원들이 너무 고통을 당하는 같아서 내가 떠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실감하면서 '사랑의샘' 활동을 다시 시작했으나 이미 그때의 수녀님도 떠나서 예전의 '사랑의샘'이 아니었고 그도 이미 예전의 장향숙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위도식의 나날이었다. 책보고 놀고 다 큰 제자들이 찾아와서 밥사주고 책사주고 산책시켜주고. 그러면서 "선생님 이제 그만 노세요. 능력 있는데 더 이상 놀고 있는 것 못 봐주겠어요."

그러던 차에 사고가 났다. "내 인생에 죽을 고비가 세 번 있었어요. 첫 번째는 물론 나의 장애이고 두 번째는 19살 때 책에 묻혀 살다가 코피가 터졌는데 코피가 멎지를 않아 수혈을 받아야 했어요. 그리고 96년 교통사고로 다 죽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아가씨가 밤늦게 의논 할 것이 있다고 찾아 와서는 기어이 바다가 보고 싶다고 우겨서 함께 나갔는데 기장 부근에서 차가 굴렀던 것이다. 병원 응급실에 옮겨졌을 때 간신히 목사인 남동생의 전화 번호를 댈 수 있었다. 몸은 전신이 부서졌고 장기가 파열되어 출혈도 심했다. 체중 25㎏에 혈압도 낮았다. 3번의 수술을 하고 비장도 떼어냈다. 모두가 가망이 없겠다고 했으나 그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다리가 다 부서져 나는 아파 죽겠는데 병신다리라고 기브스만 하고 수술을 안 해주는 거예요." 장애인이라고 보상도 제대로 못 받았다. 의사는 8개월을 처방했으나 어차피 못 쓰는 다리 더 있다고 낫는 것도 아닐 테니 3개월만에 퇴원을 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다. 그 길이 어떤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아웃사이더로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는 '황금고리 장학회'를 시작했다. 한 사람 한사람을 황금고리처럼 사랑과 나눔으로 연결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을 했고 200명이 고리가 연결되어 지원사업이 활발해지자 IMF가 터졌고 모금이 끊겼다.

부산여성연대 회장 시절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투쟁하는 장향숙씨.

1998년 5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주최하는 경주에서 3박4일간 열린 한·일장애인교류대회에 참석했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의 출발이었다. 1999년 4월 창립식을 갖고 상임대표에 이예자씨, 공동대표로는 이낙영(시각장애인 여성회장)씨와 그가 맡았다.

그는 부산조직의 책임자로 부산여성장애인연대를 설립했고 성폭력상담소, 여성장애인쉼터, 여성직업재활팀, 자립지원센터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소외계층으로서 느끼는 차별과 편견에 대해 지금까지는 당사자들과 사회를 향해 말했다면, 앞으로는 정치의 현장에서 희망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어제까지의 그는 월 30만원을 국가로부터 보조받는 기초생활 수급자였으나 이제는 세비 840만원을 받는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4년이다. 그 4년 동안 40년을 살아 온 그의 인생여정을 모두 녹여 내여 400년 한국 장애인복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장향숙씨의 삶 끝.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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