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증조부가 세웠다는 지곡교회의 1951년 모습 ⓒ지곡교회

그가 16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논밭을 팔아서 부산 감만동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진작부터 도시로 나가고 싶어했지만 땅을 중시여기는 할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지었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결국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도시에서의 16살.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단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그동안 책속에서만 읽었던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그러나 콘크리트의 도시는 너무나 삭막했고 숨이 막혔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였기도 했지만 하늘과 땅과 나무가 있는 고향 마을과 동무들이 보고 싶어 향수병을 앓았다.

고향마을에서는 혼자서도 마음대로 기어다녔고 동무들이랑 냇가에도 나갔다. 책을 읽다가 마루에 누우면 파란 하늘과 흰구름이 다가오는 고향. 감자나 옥수수 냄새 모깃불 냄새가 그리웠다. 무엇보다도 제일 그리운 것은 동무들이었다. 동무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져온 책을 읽고 난 후 동무들이 삥 둘러앉은 가운데 책 내용을 이야기하면 재미있어 하던 관중이 그리웠다. 그리고 고향에서는 아무도 그를 장애인으로 따돌리지 않았고 그도 장애인으로 살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용달 운수업을 시작하였는데 6~7년 동안은 사업이 잘 되었다. 덕분에 책은 마음대로 살수가 있었다. 부모님은 그가 원하는 책은 무엇이든지 다 사다 주셨던 것이다. 종일 방안에서 책만 읽었다.

가족 이외에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교회 사람들이었는데 목사님을 비롯하여 모두 똑같은 말만했다. ‘천당의 위로를 받고 기도하고 찬송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그분들은 왜 자꾸만 천당의 위로를 받으라고 하는지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가?, 내가 인간이기는 한데 여잔지 남잔지 어디에 속해있는지. 아무튼 더 이상 천국의 위로는 내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도, 通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책에 빠져들었다. 일종의 도피였고 무엇인가 찾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마르틴 부버의 '나와너' 같은 신학과 철학관련 책을 읽었다. 그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책을 만권은 읽었다고 했다. 루이제 린저의 '생애 한가운데' 헤르만 헷세의 '지와 사랑'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도시의 하늘에도 어느 정도 길들여질 무렵. 하루아침에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TV며 냉장고등 가재도구들을 다 가져갔다. 어머니는 물건들을 다 가져가도 별로 아까워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책을 가져 갈 때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러나 빚쟁들이 가져 간 것은 금박장정의 전집류들이었다. 빚쟁이들 눈에 허접 쓰레기로 보여 내팽개쳐진 단행본들이 그에게는 더 소중한 보물들이었다.

그의 보물 책보따리를 안고서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부산대학 근처 장전동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79년쯤이었을까. 당시만 해도 장전동은 시골이었다. 주변은 거의가 논밭이었다. 마당에는 빨간 다알리아 꽃이 피어 있었다. 고향에 온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집안은 거덜이 났고 당장 먹고 살길이 막연했지만 그는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돈을 벌러 나가고 어머니는 시장 바닥에서 옥수수를 팔았다. 그러나 잘 살 때 어머니가 베풀었던 덕분으로 사람들이 찾아 왔다. 하루는 어느 목사님이 신방을 왔다가 그를 보고는 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라면서 휠체어 하나를 갖다 주었다. 독일제 휠체어였는데 얼마나 컸던지 자신 같은 사람은 서너명이 들어 갈 만 했단다.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큰 휠체어를 타고 부산대학 근처를 돌아 다녔다. 햇살은 눈이 부셨지만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낯설었다. 그 낯선 시선들을 견디며 하고 복잡했던 오시게 시장도 헤집고 다녔다. 그냥 세상구경이었고 사람구경이었다. 어쩌면 그가 세상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구경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다 보면 할머니들은 쯧쯧 혀를 차면서 그의 무릎에 1000원 짜리를 올려 주기도 했다. 주면 그냥 받았다. 그렇게 돌아 다녔음에도 88올림픽 때까지 그는 장애인을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휠체어를 밀어 주었으나 언제까지 식구들에게 의지 할 수도 없었다. 식구들은 생계를 위해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교회 청년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들을 통해 YMCA에서 몇번 강연을 나갔다. 그가 살아 온 얘기를 하면서 주변에 청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영라이프'라는 청소년 선교모임을 만들었다. 장소는 어느 권사님이 마련해 주었다. 그는 선생님으로 불렸다. 영라이프에서는 청소년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노래를 불렀다. 7명이 릴레이가 되어 그를 업고 금정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 때 함께 했던 청년들이 세계 각지에 나가 있어 지금도 선생님을 찾고 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한 수녀님이 다가 왔다. 수녀님은 그를 보고는 이 지역의 장애인들끼리도 사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첫마디는 "우리 동네에도 장애인이 있어요?"였단다. 그는 한번도 길에도 장애인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수녀님의 주선으로 영라이프를 접고 '사랑의샘'이라는 장애인모임을 꾸렸다. 그는 자신의 장애가 가장 심하다 싶었는데 그 보다도 더 심한 장애인도 있었고 한글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가 몰랐던 장애인의 세계였다. 장애인 세계에 대해서 알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향숙씨의 삶은(3)편에 계속.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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