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맹아학교 밴드부 왼쪽에서 두번째 테너섹스폰 연주자 정화원씨 ⓒ부산맹학교

어머니는 집안에 많은 하인과 머슴을 거느리고 대접받던 종부였으나 낯선 부산으로 내려와보니 살길이 막막하였다. 처음 부산 수정동 셋방에 살면서 의붓아버지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살림은 늘 궁색하였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치료도 포기 한 채 몇년을 빈둥거리며 동네 골목대장 노릇을 하다가 보통의 아이들이 중학교를 다닐 나이인 15살 때 부산맹아학교 초등부 1학년에 입학하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영도에서 조그만 가내공업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희미하게 볼 수는 있었기에 영도에서 송도에 있는 학교까지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학교에서는 이름표를 달아 주었는데 어머니는 한사코 맹학교 이름표를 못 달게 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학교에 음악선생이 새로 왔다. 그 때는 맹아(盲啞)학교라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한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새로 오신 주창길 음악선생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함께 하는 밴드를 구상하였다. 보지 못하는 아이들과 듣지 못하는 아이들로 구성 된 악단이라니. 보통의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을 주선생은 추진했던 것이다.

당시 부산맹아학교에 고등부는 없었고 중등부라고 해 봤자 한반에 10여명이었으니 학생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밴드를 만드는데도 음악에 소질이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단원이었다.

청각장애인에게는 탬버린 실로폰 북 등 타악기를 가르쳤고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관악기를 가르쳤는데 그에게 배당된 것은 테너섹스폰이었다.

그에게는 평생에 한이 되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눈 감은 것이고 둘째는 노래를 못한다는 것이란다. 음악선생도 '너 같은 음치는 세상에 처음 본다'면서도 테너섹스폰을 볼어 낼 사람이 없었기에 그에게 맹훈련을 시켰고 그는 매일 얻어 맞았음에도 밴드부장이었다.

첫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언론이 극찬을 했고 이곳저곳에서 초청을 받아 순회공연에 나섰다. 서울 한양대학을 비롯하여 동양TV 삼일당 이화여대 진명여고 등에서도 공연을 했다. 하기 싫은 공부를 안해도 좋았고 가는 곳마다 우뢰같은 박수소리와 여학생들의 팬레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이 났던 것은 순회공연에 나서면 맛있는 것을 잘 먹을 수가 있었다. 모두가 배가 고픈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가르쳤던 음악선생은 임시교사라 그만두게 되었고 그의 눈도 점점 나빠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의사는 그 이유를 힘든 테너색스폰 때문이라고 했다.

여름 방학에는 합숙을 하고 하루종일 연습을 했는데 연습이 끝나면 송도 바닷가로 내달렸다. 담치 멍게 해삼 등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고 송도 파출소옆 자주 가는 술집으로 가져가서 그것을 안주 삼아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셨다. 하루종일 고된 연습에다 날마다 술이니 몸이 배겨 날리가 없었던 것이다. 연주곡들도 장난감교향곡 영광의 탈출 평화의 나팔소리 등 쉽지 않은 곡들이었던 것이다.

새로 온 음악선생은 장애인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없었고 그도 어머니가 더 이상 섹스폰을 못하게 하는 등 세계공연까지 계획했던 맹아학교 밴드부는 흐지부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섹스폰을 불었고 트럼펫을 불었던 김원경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도 그처럼 점점 눈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술을 마시며 눈 감은 것에 대한 신세한탄을 했다. 송도 바다에서는 같이 죽자며 무작정 헤엄쳐 나갔다가 해경에게 붙잡혀 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후배들과 함께 외출을 나갔다가 복음병원 근처 언덕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신세한탄을 했다. '우리 이래 살면 뭐하겠노' '그라믄 죽을래' '어무이 아부지는 와 나를 이래 낳아 갖고.' '신은 무신 신이고''하나님이 어데 있노' 그들의 신세타령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에서 신에 대한 부정까지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그러자 후배 하나가 '나는 죽을끼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언덕을 굴렀다. 그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언덕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았다. 죽을끼다. 안된다. 서로 부둥켜안고 그렇게 옥신각신 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싸이렌소리가 들리더니 '손들어!'라고 했다.

깜깜한 밤중에 술취한 남자들-중학생이었지만 거의가 스무살 무렵이었다-이 죽네 사네하고 고함을 질러대니 인근주택가에서 경찰에 간첩신고를 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무릎끓고 빌고빌어 온갖 벌을 다 받았는데 그래도 퇴학을 당하지 않은 것은 잊지 못할 강위영 박사 덕분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맹학교로 유학을 갔다. 파란만장했던 서울 맹학교 고등부를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 왔다. <정화원씨의 삶은 (3)편에 계속>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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