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 된 정화원 국회의원.

"회장님 눈 안 뜨셨어요?"

"허허허허 까딱 했으면 봉사 눈 뜰뻔 했지"

"눈뜨면 큰일 날테니 눈 꼭 감고 계세요"

한나라당 비례대표 8번으로 발표가 난 후 필자와 나눈 농담이다.

봉사(奉事)란 조선시대 종8품 관직명으로 시각장애인들도 할 수 있었던 벼슬이다. 어느 분의 분류를 보니 국회의원은 조선시대로 치자면 판서에 해당되는 정2품이란다.

정화원(鄭和元·56) 그는 진양 정씨인데 고향이 경북 상주군 외서면 우산리이다. 우산리에는 우산서원이 있다. 우산서원은 조선 명종 때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에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던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말년에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우복선생은 불천위(不遷位 : 나라에 끼친 큰 공훈으로 사당에 영구히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로 정화원 그는 우복선생의 14세손이다.

할아버지 정용진은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는데 딸 정희는 퇴계 이항 가문의 종부로 시집을 갔고 큰 아들 정환은 양반가문과 혼반(婚班 :서로 '혼인할 만한 양반의 지체'를 이르던 말)을 맺으려는 밀양의 만석꾼 허섭과 연이 닿아 김천고등학교 3학년 때 그의 큰 딸 허수와 혼인을 하였다.

정환은 경북대학교에 진학을 하여 아내 허수와 대구에 살았는데 1948년 7월 아들 정화원을 낳았다. 아들이 세살 나던 해 즉 1950년 6.25가 일어났고 아버지 정환은 학도병으로 출정하였다. 남편은 출정하고 전쟁은 더욱 치열하여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어야 한다면서 어머니는 어린 아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고 어렵사리 군용 트럭을 얻어 타고 고향 상주로 가는 길에 폭격을 맞았다.

우산서원이 있는 우복종가 ⓒ경북 상주시 외서면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건져서 고향에 당도하니 때는 수확 철이라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부둥켜안고 '이 모를 환이가 심었는데 환이는 어디 가고 나락은 누가 거두느냐?'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들에게 눈병이 났다. 눈은 짓무르고 늘상 눈꼽이 끼었다. 아마도 피난길에 폭격을 맞으면서 눈에 파편을 맞은 모양이었다. 전쟁 중이었고 이렇다 할 약도 없었다.

전쟁이 끝났으나 아버지 정환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사통지서도 없는 행방불명이었다. 그는 보훈가족이 되기는 했으나 아버지가 행불이었으므로 80년대까지도 형사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의 어머니 허수(76)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도 아들의 눈이 더 큰일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국 방방곡곡을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여느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이 병원이나 약방을 아무리 전전해도 낫지를 않았고 무당을 불러 굿도 하는 등 별의별 짓을 다했지만 눈은 점점 나빠졌다.

나이가 들어 외서초등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칠판글씨가 보이지도 않았고 공부에는 아예 흥미가 없었다. 학교에 갈 때는 종을 앞세워 나귀를 타고 갔고 학교에서는 마음대로 돌아 다녔다. 선생이 숙제를 내 주면 숙제도 종이 다 했다.

그는 지체 높은 양반가문의 종손이라 선생들도 그에게는 야단도 못 치고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 소풍가자면 소풍을 갔고 공차기하자면 공차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가 소풍을 가자고 졸라서 봄소풍을 두 번이나 간 적도 있었단다.

전쟁이 끝난 후 가세는 기울었으나 외할아버지가 갑부였으므로 치료비는 외할아버지가 다 대 주었다. 그의 눈이 점점 나빠지자 외할아버지는 딸을 앉혀보고 '너는 양반가문의 종부이니 절대로 재가 할 생각은 말고 아들 치료에나 힘쓰라'며 대구에 집을 얻어 주었다.

그 때 어머니의 나이는 28살이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과 살길이 막연하였다. 그 무렵 눈먼 아들과 홀로 사는 아름다운 비운의 청상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는 결국 눈먼 아들을 위해 가문을 버렸다.

어머니는 눈먼 아들을 데리고 그 사람과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내려왔다. 시가에서나 친가에서나 그런 어머니와는 의절하였다. 때문에 어머니는 시아버지나 친정아버지의 상에도 참여를 못하였다. 물론 종손자리는 작은아버지의 아들인 사촌동생에게로 넘어 갔고 그가 시의원이 된 후 처음으로 종가에 가 볼 수가 있었다.

<정화원씨의 삶은 (2)편에 계속>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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