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콘트롤러(상) 보조페달(중) 선회장치(하)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고등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부모님이 운영하던 가게가 부도를 맞았다.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동상동(현 서동) 월세방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님이 국가유공자였으므로 학비 걱정은 없었지만 금정구 동상동에서 동구 초량동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문제였다. 보조기를 하고 양 목발을 짚고 만원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고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79번이나 99번 버스를 탔는데 중간지점이므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서면에 내려서 갈아타는 28번 버스는 더 복잡했다. 그래서 서면에서 내리면 초읍까지는 걸었단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보조기 하고 목발을 짚었지만 30분쯤이면 초읍 종점까지는 갈 수가 있었고 종점에 가면 앉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이 학교를 다닌 다는 것은 공부는 둘째치고 등하교 자체가 끝없는 인내심과 극기가 필요한 현실이었고 그 같은 상황은 2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힘들게 학교를 다녔음에도 졸업이 다가오자 오히려 걱정이었다. 당장 부모님과 동생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니 대학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구해 보려 했으나 그를 받아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점상을 시작했다. 장난감 군고구마 붕어빵 등 닥치는 대로 다 해보았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 장애인에 관한 내용들이 나왔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부산장애인재활협회를 찾아갔다. 졸업 후 2년 동안 취업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그 어려움을 세상에 알리고자 자신이 걸어서 제주에서 서울까지 장애인고용캠페인을 하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했다. KBS방송국에 편지를 보내놓고 직접 서울까지도 찾아갔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얼마 후 재활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그의 제안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사상에 있는 세신정밀이라는 곳에 취업을 시켜 주었다. 세신정밀은 수저 등 가정용품들을 생산하는 회사인데 그는 연마를 맡았으나 월급이 얼마 되지 않았다. 6개월 후에는 그곳보다는 월급이 조금 더 많은 대한금속으로 옮겼다.

대한금속에서 그가 하는 일은 돌아가는 칼날 앞에서 전자제품의 부속을 깎는 일이었다. 하루종일 날카로운 칼날 앞에서 하는 일이다 보니 조금만 방심하면 손을 다치기 일쑤였고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느 날 그도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다쳐 17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붕대를 감은 손을 보니 다리도 부실한데 손까지 다치면 어떻게 하나 싶어 겁이 났고 결국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그 동안 동상동에서 사상까지 출퇴근하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집에서 가까운 금사동에 있는 행성사에 직원모집이 있었다. 행성사에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았고 합격이 되었다. 행성사는 전자제품 부품을 만드는 금성사 협력업체로 지난번에 다녔던 회사들보다는 규모도 컸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아이디어가 풍부해서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장애인으로서 비장애인 위주로 되어 있는 시스템이 문제였다. 자신이 일하는 곳은 자신에게 맞게 고쳤다. 회사에는 그 외에도 몇 사람의 장애인이 있었는데 한 장애인이 작업 능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 보다 월급이 적었다. 작업능률이 떨어지는 이유를 찾아보니 작업대가 그의 신체조건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작업대를 개조해 주고 임금을 소급 정상화 시켜 주었다.

회사에서 외주팀장을 맡으면서 밖으로 나갈 일이 많아졌다. 다른 사람들이 운전하는 것을 보니 자신도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산에는 장애인 운전면허 시험장도 없었기에 서울 강서면허시험장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쳤고 2종 운전면허을 받았다. 운전면허를 따기는 했으나 장애인 차량용품은 대부분이 수입품이었기에 가난한 장애인들에게는 꿈에 불과 했다. 업무가 끝나면 수입부품인 장애인 차량의 핸드콘트롤을 살펴보면서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차를 샀다.

그가 만든 핸드콘트롤(수제동장치)은 새로운 국산제품이었다. 자신이 개발한 핸드콘트롤을 장착한 차를 타고 다니자 입소문이 나면서 장애인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체구조에 맞게 핸드콘트롤을 만들어 주었다. 점점 많은 장애인들이 그를 찾기 시작하자 1989년 회사를 그만 두고 장애인차량연구소를 개설하였다.

김광표씨의 삶은 (3)편에 계속됩니다.

*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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