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성 전 교수는 내적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피에로 분장을 하고 1인 시위를 펼쳤다. ⓒ안태성

휠체어를 타게 되면, 시각장애인용 흰지팡이를 짚게 되면 장애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쳐다보는 시선만으로도 낙인을 찍어대는 것 같아 숨고 싶다는 장애인들도 있다. 도리어 겉으로는 차이나지 않은 청각장애인들에게까지 ‘장애인 표식’을 달자는 분이 있어 만나봤다. 1년간의 긴 싸움 끝에 1월 13일,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안태성 교수. 말이 아니라 이메일 주고받기로 진행됐기에 그 어떤 인터뷰보다 속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인터뷰가 될 수 있을 듯.

예다나: 청강대에서 해직 처분을 당하신 걸로 아는데요. 과정을 좀 설명해주세요.

안태성: 내 투쟁은 미리 예견된 것이다. 청강대 임용 후부터 청각장애를 이유로 차별과 따돌림과 왕따가 예견되었고 해가 갈수록 노골화되어 갔다. 나는 이런 걸 알고 청강대 재직 7여년 간 계속 자료를 모았다. 2007년 청강대는 계약만료 5일을 앞두고 느닷없이 계약서를 보여주며 서명하라고 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년간 강의 전담직으로 있었으니 다시 강의 전담에다, 거기다 계약기간은 1년으로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기가 막혔다. 나는 99년 전임강사 대우 6개월로 시작, 2001년 만화창작과 초대 학과장을 맡았다. 정년이 보장된 전임교수였는데 청천벽력으로 시간강사와 다를 바 없는 강의 전담으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동안 회유하려고 던진 기획실장의 약속만 믿고 이번에야말로 조교수로 다시 복직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예다나: 결국 학교 측의 부당함 때문에 1인 시위를 하신 거군요.

안태성: 처음으로 교문 앞 시위를 하는데 아내가 따라 나왔다. “울지마! 울려면 차에 있어” 내 말에 아내는 “안 울께, 그냥 옆에만 서 있을께”라며 울먹였다. 하굣길의 학생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첫 1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두 달 정도 계속 교문 앞에 서 있던 어느 날, 문득 교문 앞에서만 시위를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사람들에게, 사회에 이 부당함과 사학의 횡포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시간에 아내와 밥상머리에 앉아 의논을 했다. 내가 피에로 분장을 하자고 하자 아내는 남대문에서 적당한 복장을 찾아 사오겠다고 했다. 사온 것이 이소룡의 노란색 트레이닝복이었다. 입어보니 몸매가 드러나 민망했으나 참기로 했다. 우리는 교문 앞 시위가 있는 화요일 이외에는 감사원이나 국회, 교육부 등지에서 시위를 했다.

예다나: ‘슬픈 피에로’ 분장에는 의미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안태성: 피에로 분장의 의미는 내 안에 담긴 슬픔을 유형화시켜 밖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동네 들판에서 곡마단이 판을 펼치면 그들의 초라한 행동거지와 허술한 시설, 어설픈 몸짓은 패배자들의 아릿한 슬픔을 안겨준다. 나는 동양화 작가로 활동 시, 피에로 연작을 발표하여 많은 상을 받았다. 피에로는 내 안의 슬픔을 시각적으로 호소하며 보여줄 수 있는 행위예술이자 퍼포먼스다.

그러나 주위의 해직교수들은 너무 튄다며 청강대가 이걸 이유로 더더욱 복직을 거부하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중학교 3학년인 아들아이가 혹시라도 피에로 분장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고 주눅 들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성장기인데 아비의 해직을 알게 되면 사회에 대한 적의가 생기지나 않을까, 그 점이 걱정이었다.

안태성 교수의 부인 이재순씨도 소복 퍼포먼스로 해직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안태성

예다나: 얼마 전 승소 판결이 난 걸로 압니다.

안태성: 우리 부부는 지난 1년간 시위와 각종 투쟁을 했다. 현재 나는 무직 상태라 수입이 없어서 처가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쓰고 있다. 올해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뒤엔 어떻게 하면 먹고 살만한 일이 없을까 궁리하는 중이다. 청강대는 패소하자 항소했으며 우리 부부는 다시 투쟁하려 준비하고 있다.

청강대는 2002년도에 대대적인 교육부 감사를 받은 학교다. 그러나 당시 교육부의 지적 사항들을 아직도 시정하지 않고 있다. 기자들을 수없이 만나 청강대의 불법비리를 제보했으나 간담이 약한지 한번 듣고는 꼬리를 감추기 급급했다. 따라서 검찰에 직접 고발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활비를 버는 것이다.

예다나: 청각장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갖고 있는지 가늠이 잘 안됩니다. 교수님의 장애 정도가 궁금합니다.

안태성: 나는 청각장애 4급이다. 객관적으로 4등급이나, 같은 등급이라도 사람마다 정도가 다르다. 나 같은 경우는 공식 업무 중에는 보청기를 착용하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보청기 잡음이 신경 쓰여서 빼놓고 지낸다. 보청기를 사용하게 되면 사람 목소리가 보다 명확하게 들리나 강당 같은 넓은 곳에선 주변의 잡음들이 섞여 무슨 소리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보통 나는 상대의 입 모양을 보지 못하면 가까운 곳에 있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이 때문에 예전에 공장에 다닐 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윗사람들로부터 듣고도 대답을 안 한다고 무수히 얻어맞았다.

예다나: 소송을 당하자 청강대 측에서는 재직 시 교수님의 장애를 몰라서 배려하지 못했다고 발뺌을 했는데요.

안태성: 강의 시에 학생의 옆자리로 가서 입 근처에까지 귀를 대고 듣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내가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학과장 재직 시, 보직교수 회의 때는 옆 사람의 노트를 보고 베끼거나 회의가 끝난 후 관련 내용을 물어보기도 했다.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됐지만, 청강대 길모 기획실장은 세미나와 워크숍 및 학교 행사시에 마이크를 잡고 “안 교수님, 이 정도 말이면 들리십니까”라고 크게 묻곤 했다. 재임용 문제로 힘들게 한 분이지만 이 때 만은 배려가 고마워 마음이 훈훈했었다. 그런데 학교 측은 내가 해직되고 나자 수많은 증거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교수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해직된 뒤 처음 알았다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

귀를 형상화해 만든 ‘청각장애 표식 달기’는 청각장애인이 받는 오해와 차별에 대응해 내놓은 안 교수의 대안이다. ⓒ안태성

예다나: 뜻밖으로 다가온 게, 부인께서 소복 퍼포먼스를 하셨어요. 그 장소가 해고 조치한 청강대 재단이사장이 다니는 교회 앞이었지요.

안태성: 아내는 청강대 이사장과 학장이 여자이니 자신이 만나 탄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나의 해고와 사회적 매장을 의미하는 소복을 입고 피가 뿌려진 내 관을 준비하여 교회 앞에서 시위를 했다. 아내는 시위 중 많이 울었다. 교회 목사와 신도들은 몰려와 ‘청각장애인 해직교수’라고 쓰인 관을 발로 차고 혐오스럽다며 교회 앞에서 하지 말라고 쫓아냈다. 경찰들이 출동하기도 했다. 교회에 나타난 이사장을 보고 다가가자 신도들과 청강대 인사들까지 아내를 밀치고 넘어뜨리며 이사장과 만나는 것을 제지했다.

교회 정문에는 “세상일에 괴로워 울고 싶을 때 이곳에 오시어 예수님의 사랑을 느껴보세요”라는 글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우리는 울고 싶고, 우는 당사자인데도 교회 목사와 신도들은 정작 그 글과는 관련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예다나: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청각장애 표식’을 달고 다니자고, 참 독특한 제안을 하셨더라고요. 주변 농인들의 반응은 어떤지요.

안태성: 장애를 자랑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지체장애나 다른 장애는 드러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배려해준다. 청각장애는 드러난 장애가 아니므로 사회적으로 가장 오해를 많이 산다. 이 때문에 일정한 배려문화가 정착될 때까지 ‘청각장애’라는 표식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청각장애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차별을 받는 것도 표식이 없기 때문이다. 청각장애인들은 과묵하고 사회성과 사교성이 없어서, 빠릿빠릿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한다고 오해를 받아 승진이나 발전 등에 지장을 받는다. 이 같은 오해를 타파하기 위해 청각장애인들은 한시적으로 자신들의 옷깃이나 가슴에 ‘주홍 글씨’를 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다른 장애인처럼 청각장애인들도 농인에 대한 문화적인 성숙도가 높아질 때까지 표식을 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태어나고 만들어질 농아 후손들에게 유산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그러나 농아협회에 건의했더니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들리는 말로는 농아들이 그런 표지를 달고 다니는 것을 꺼려하므로 건의 자체를 원천봉쇄했다는 소식이다. 차라리 이에 관한 청문회를 열어 장시간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나라도 혼자 달고 다닐까 궁리 중에 있다.

예다나: 한 번씩 장애인에게 이상적인 근무 환경은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곤 합니다. 청각장애인 그리고 만화과 교수. 어떤 환경에서라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을까요?

안태성: 상대방이 나를 잘 못 듣는 “귀먹쟁이”라고 알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비장애인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왁자하게 웃을 때 내가 뭣 때문에 웃냐고 물어도, “별거 아니니 신경쓰지 마세요”라는 답변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가와 고저장단이 없고 어눌한 내 말투를 흉내내며 “안녕하세요, 교수님”하는 말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단지 한 가지만 알면 모든 것은 풀리게 된다. “상대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예다나 기자는 지난해 에이블뉴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올해부터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장애인당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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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합시다]장애인들은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에게 이것을 바란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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