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터닝포인트가 온다.

내 인생 전체를 바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 길에 섰지만...작은 한순간 한순간을 태산같이

모아 크게 빵 터지는, 티핑포인트에 닿으련다.

무를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그때의 선택을

옳게 만드는 힘은, 결국 지금,

오늘 하루의 힘!”

이글은 윤서원의 ‘그렇게 길은 항상 있다’중에서 ‘터닝포인트/티핑포인트’다. 김문희 씨가 좋아한다는 내용이다. 윤서원의 ‘그렇게 길은 항상 있다’는 에세이에 나오는 말인데. 우리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이 되는 삶이 온전한 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윤서원은 ‘터닝포인트/티핑포인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터닝포인트'는 말 그대로 '방향을 바꾸는 점'이고, '티핑포인트'는 작은 점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폭풍성장의 점'을 말합니다.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터닝포인트'와 '티핑포인트'가 한순간에 만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 극적인 경험이 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꿉니다. 오늘이 그 시작입니다.’

김문희 씨. ⓒ이복남

김문희 씨는 그 많은 길 중에서 ‘터닝포인트/티핑포인트’를 골랐다. 터닝포인트(Turning Point)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내가 걸어 왔던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순간 돌리면 된다. 그렇다면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란 무슨 말일까. 티핑포인트란 ‘갑자기 뒤집히는 점’이란 뜻으로 때로는 엄청난 변화가 작은 일들에서 시작될 수 있고 대단히 급속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티핑포인트를 넘어설 때에 내 삶에 터닝포인트가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김문희(1991년생) 씨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직장에 다녔다고 했는데 아이가 태어나자 엄마는 아이에게 매달렸다. 아이가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때 그 시절을 회상했다.

“아이가 앞도 보지 못하는데 잘 먹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를 안고 여기저기 병원을 전전했다.

“부산의 한 병원에 갔더니 아이를 너무 함부로 다루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해서 다른 병원으로 갔습니다.”

아이가 앞을 보지 못하는데 의사는 병명을 모른다고 했다. 서울에도 가고 수원에도 가고 조금만 용하다는 병원이 있으면 찾아갔다.

“가끔 다른 분들이 참 고생했겠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가 눈을 감았을 뿐이지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는 그 정도 고생이야 누구나 다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유도에서 짚라인. ⓒ이복남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면서 특별히 고생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언짢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위로한답시고 “아이 때문에 정말 고생 했겠다”고 하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누구나 다 한 고생과 어려움일 텐데 우리 아이가 눈을 감았다고 해서 특별히 어렵고 고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김문희 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한 내용이다.

“아이가 잘 먹지를 않고 밤에도 잠을 잘 안 잤습니다.”

아이가 잘 먹지도 않았고 밤에는 잠도 잘 안자서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꼬박 날밤을 새워야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잘 먹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딸(김문희) 때문에 노심초사했고, 외할머니는 그런 딸(김문희 어머니)과 손녀를 보면서 안타까워했다.

정말 죄송한 얘기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은 게, 왜 동생을 안 가졌을까.

“사실 우리 문희가 앞을 보지도 못하고, 시댁이나 친정에서도 동생을 하나 가지라고 해서 저도 동생을 하나 낳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희 씨를 가졌을 때도 입덧이 심해서 거의 먹지를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동생을 하나 가지려고 했지만, 한번 유산이 되었고 그 후에는 동생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 문희는 딸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 같은 멘토입니다.”

어머니는 딸을 보통의 아이처럼 무엇이든지 혼자 할 수 있도록 강하게 키웠다고 했다.

“특히 철이 들면서부터 혼자 다닐 때는 흰지팡이 없이는 못 다니게 했습니다.”

흰지팡이가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야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는 장애인들의 이중성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보통의 아이들처럼 그리고 강하게 키웠다고 했다.

김문희 씨는 눈이 거의 안 보였고 의사도 원인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계속 병원을 다녔고 수술을 7~8번은 했다고 했다.

“원인은 잘 모른다고 했지만 초점이 없는 일종의 안구진탕이었습니다.”

안구진탕이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안구가 움직이는 것이다.

“여러 번 수술을 했음에도 안구진탕 증세는 나아지지 않아서, 현재 왼쪽은 의안입니다.”

왼쪽은 포도송 종양이라는 병명으로 진물이 심하게 나고 통증도 심해서 적출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딸을 일반 유치원에 보냈다. 그런데 딸은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앞에 있는 계단과 턱을 잘 보지 못할 까봐 그 위험성을 감지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이다.

어머니는 딸이 조금이라도 일반사회에서 함께 어울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반 유치원을 보냈는데 비장애 아이들이 장애를 인지하고 잘 챙겨 주고 어울렸다고 했다.

“어렸을 때 이모나 삼촌이 저를 보고 고개 숙이지 마라, 고개를 들고 앞을 똑바로 보라고 했는데 이모의 그 말이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모는 아마도 앞을 보지 못해 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더빙수업. ⓒ이복남

어머니는 장사를 하셨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딸을 공원으로 데려가서 꽃과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꽃이 언제 피고 지고,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표정, 특이한 일 그리고 매일매일의 다른 분위기 등을 알려 주셨다.

“엄마가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있는 공원에서 코스모스를 만져 보고 그 향기를 맡게 해 주신 것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엄마는 딸을 위해서 나무 조각을 깎아서 한글과 숫자를 만들어서 딸에게 가르쳤다.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이 눈으로 보면서 한글과 1 2 3 4를 배울 때 저는 엄마가 나무 조각으로 만든 퍼즐 같은 걸로 한글과 숫자를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나무 조각 퍼즐로 딸에게 가나다라와 1 2 3 4를 가르쳤다.

“엄마는 내 딸이 커서 스스로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다양한 생활을 접하게 해 주었습니다. 엄마는 안 보인다고 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므로 사소한 것이라도 몸으로 익히고 보여 줘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앞 못 보는 딸을 위해서 노심초사 하고 있었지만, 그런 어머니의 어머니는 그런 딸이 너무나 애틋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외할머니가 오셨는데 이렇게는 안 된다며 당장 짐을 싸라고 하셨습니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어머니 혼자서 아이를 돌보기 힘들 거라고 했다.

외할머니의 성화로 그날로 부산을 떠나 **외가로 이사를 했다.

“학교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엄마나 아빠, 이모나 삼촌, 아무나 시간 되는 사람이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친정집에서나마 딸 문희를 잘 키우고 싶었다.

“엄마도 저를 그렇게 키우셨고, 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은 다 같이 했습니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이면 대부분의 장애아이들이 교실지킴이를 하는 것과 다르게 그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운동장에서 어울렸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사팔이(사시)라고 놀리고 따돌렸습니다. 하루는 굴렁쇠를 돌리던 어떤 아이가 사팔이라고 놀리며 굴렁쇠를 저에게 험악하게 굴리는 바람에 얼굴을 다쳐서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놀람과 분노로 억장이 무너졌다. 어머니는 딸을 위해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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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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