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김양수 회장. ⓒ에이블뉴스

# 2001년 6월 8일. 전날 총선에서 승리한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가 2기 정부의 신임 내무장관으로 데이비드 블런킷을 내정했다. 영국의 주요 국가과제인 범죄소탕, 이민, 망명 문제 등을 담당하게 될 그는 1기 정부 교육장관 재임시절 과감한 투자와 지도력을 통해 노동당 정부가 교육 분야만큼은 비교적 큰 성과를 거뒀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안내견을 동반한 장관’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이하 한특총)는 작년 2월 27일부터 3월 6일까지 우편투표를 통해 제 27대 회장 선거를 치렀다. 선거 결과, 한빛맹학교 교장인 김양수 후보가 총 3633표 중에 2604표(72%)를 획득하면서 장병호(당시 한특총 회장) 후보를 제치고 제27대 회장으로 뽑혔다. 이로써 17세 때 실명한 김 회장은 1962년 설립된 한특총의 최초 장애인 회장이 됐다.

김 회장에게 블런킷은 롤모델이다. 그는 지난 9일 ‘장애청년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 욜로(독일)팀과 만난 자리에서 “영국의 데이비드 블런킷처럼 교육부 장관이 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인 출신 시각장애인인 故 강영우 박사도 미국에서 정책차관보까지 했다”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보고 싶다. 그래서 장애인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자립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2000년 한빛맹학교 교장이 된 후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 제공해 그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한빛예술단’ 사업이다. 김 교장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직업이 눈으로 하는 거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은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직업이 제한적”이라며 그래서 대부분 안마업을 택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학생이 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했고, 이것이 김 교장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게 예술단은 시작됐다. 그 당시를 그는 “졸업생 가운데 예술단에 들어온 학생들이 음악을 통해 직업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한 번 해보자’란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어려움도 있었다. 재정적인 것이 가장 컸다. 이에 대해 그는 “일반인이 문화 예술을 한다고 해도 엄청나게 힘든 일인데, 우리에겐 더 힘든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학생들의 꿈을 지켜주기 위한 김 교장의 노력 덕에 한밫예술단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연단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김 교장은 또 전맹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마업 활성화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그는 2011년에 학교 근처에 ‘효정안마센터’를 설립하고, 졸업생 등 시각장애인들을 안마사로 고용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그는 “이를 통해 건전한 안마센터를 전국에 100개 만드는게 목표”라며 “그래서 전맹 시각장애인들에게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안정적인 직업이 되게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한특총 회장이 된 것에 대해 “내가 장애인이어서 뽑아준 것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더 노력해서 장애인 후배들에게 선례가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은 김 교장과의 일문일답

욜로(이하 욜) : 중도에 실명을 하셨다고 들었다. 중도의 실명을 하시면 선천적으로 실명한 사람보다 상실감이 크고 헤어 나오기가 어려운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극복했나.

김 교장(이하 김) : 내 장애는 선천적이다. 망막색소변소증이라고 유전적인 병이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학교를 들어갔는데, 키가 컸다. 그래서 뒤에 앉았는데 칠판이 안 보였다. 그땐 그저 눈이 나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가보니까 망막생소변소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제 동생도 저처럼 똑같은 질병이었고, 저희 모두 17세에 완전 실명했다. 당시 부모님과 저 그리고 동생이 자살을 기도했는데 3일 만에 깨어났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다.

욜 : 그럼에도 살면서 많은 좌절을 겪었을 것 같다. 그럴 땐 어떻게 극복했나.

김 : 크게 좌절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아마도 좌절의 기간이 길었기 때문인 것 같다. 실명하고 난 뒤부터 항상 좌절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다만,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욜 : 지금 한빛맹학교 교장, 한특총 회장 등 다양한 일을 하고 계신다.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을 무엇인가.

김 : 첫 번째 동력은 신앙이다. 나는 크리스찬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장애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신의 법칙이다. 그래서 난 내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장애인이 됐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면 천국에 가리라 믿는다.

둘째는 나와 같이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 후배들이 편한 삶을 살게 도와주겠다는 공명심이나 정의감이다.

욜 : 그래서 다양한 사업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에게 직업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김 : 시각장애인들은 직업선택의 폭이 적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눈으로 하는 정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경쟁이란 게 문제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들이 경쟁력을 갖고 선택을 할 수 있는 직업이 적은 거다.

이런 이유로 한빛예술단도 만들었고, 안마센터도 설립해 많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욜 : 앞으로의 목표는.

김 : 교육부 장관을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래서 장애인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자립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이글은 ‘2013 장애청년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 ‘욜로’팀의 심지용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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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용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대학생 페이스북 페이지 ‘나도 칼럼니스트’에 5년간 기명칼럼을 연재했다. 2013년 12월부터 1년 간 KBS <사랑의 가족> 리포터로, 2017년 5월부터 약6개월 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블로그 기자로 활동하며 장애 문제를 취재해 사회에 알리는 일을 했다. 장애 청년으로 살며 느끼는 일상의 소회와 장애 이슈에 대한 생각들을 칼럼에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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