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의 김영하씨. 노는 것도, 아르바이트도, 공부도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어하지 않던 열성적인 사람이었던 그녀는 지금도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열심히 산다. ⓒ김영하

- 그럼 어느 날 급작스레 장애인이 된 건가요?

"숙명여대에 재학중이던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갑자기 아팠어요. 그전엔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없는 건강체질이었답니다. 저희 집에선 제가 막내여서 집에선 가까운 전남권에 있는 대학을 가길 원했는데요. 제가 우겨서 서울로 간 거였어요. 그만큼 건강하니까 집에서도 안심하고 서울로 보냈던 거죠.

처음으로 가족하고 떨어져서 자취란 걸 너무 하고 싶어서 한 달 했었는데, 학교생활이 엉망이 돼서 다시 학교 앞에서 하숙했더랬어요. 이젠 맘잡고 공부를 해야지, 맘 먹었는데 그 때 아프게 된 거예요. 처음 증상은 감기 같았대요. 이렇게 말하는 건 제가 당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인데요. 인근 병원에 갔는데,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아지자 목포에서 저희 가족이 다 올라와서 저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대요. 그리고, 서울대병원에서 검사를 받던 중 숨이 멈췄다는 거예요. 더 이상 깨어날 가능성이 없자 저에게 뇌사판정이 내려졌다고 하더라고요. 전 이 얘기를 깨어나서 들었어요. 이때 일은 지금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답니다."

- 그럼 뇌사판정 후 얼마만에 깨어난 건가요?

"서울대병원에서는 기적이 없는 한 깨어나기 힘들다고, 만약 깨어나더라도 머리가 아마 정상이 아닐 거라고 했는데, 그런 병원의 모든 예측을 깨고 40일만에 깨어난 거고요. 전 처음에 깨어났을 때 제가 고3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내가 대학생이었던 것도, 여름에 농촌봉사활동 갔던 것도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아직도 아프기 바로 전은 기억이 깜깜해요. 병명은 뇌수막염이라고 하는데, 서울대학교병원에선 제 뇌에 들어간 바이러스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거라고 하더라고요."

- 요즘엔 스쿠터 운전에 재미를 붙이셨다고요?

"요즘 제 삶이 업그레이드 됐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인데요. 혼자 집 밖에 나가는 일은 엄두를 못냈는데 스쿠터에 혼자 타고 내리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저 혼자만의 외출이 가능해졌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타는 방법을 찾아냈거든요. 그게 가능해지자 지금은 가까운 곳은 스쿠터로 달려 가게 됐어요.”

- 스쿠터는 언제 장만하셨는데요?

“그게 좀 안 좋은 사연이 숨어 있어요. 세무서에 오신 분 중에 유독 제 휠체어에 친근감을 표시하며 아는 척하는 민원인이 있었답니다. 무슨 장애인협회 회장이라면서, '조사관님 스쿠터 있으세요? 그거 진짜 조사관님한테 필요한 건데, 없으시면 하나 하세요. 다른 건 다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조사관님은 그냥 저희랑 같이 병원에 가서 진단서만 받으면 돼요. 물론 공짜고요' 하셨어요.

처음엔 출퇴근을 차로 하니까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했는데요.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게 있으면 가까운 데는 나 혼자 다닐 수도 있을 거다, 싶어졌어요. 제가 사는 아파트엔 언덕이 있어서,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도 휠체어를 혼자 밀고 집밖을 나가는 건 엄두를 낼 수가 없었거든요. 하여간, 이렇게 해서 제겐 전용 자가용이 생겼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많은 기계라는 걸 알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 문제가 있는 기계라니요?

“제 스쿠터의 외양은 그럴싸해서 엄청 좋게 보이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밤새 충전을 해도 한 시간을 넘기질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장거리 외출은 아예 엄두를 못낼 수밖에 없어요. 물론 저는 이걸 타고 장거리 나갈 일이 없지만서도, 온전히 이 스쿠터에 의지해야만 하는 다른 장애인이 이 기계를 받았을 걸 생각하면 화가 나요.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그 분은 저한테 친절하게 도움을 준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판매하고 교묘하게 정부보조금을 다 챙겨먹은 거였어요. 우리나라엔 이런 일을 제재할만한 법적 장치가 없는 걸까요?”

- 그런 일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너무 속상하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스쿠터 한 대로 인해 삶의 질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걸 느낀답니다. 제가 워낙 긍정적 성격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스쿠터가 생기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나가고 싶을 때 집 밖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제 내가 밖엘 나가고 싶을 때, 주말 같은 때 하루종일 잠에 취해 있다가 시원한 바람이 쐬고 싶을 때, 스쿠터로 드라이브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답니다. 외출하고 싶을 때 나갈 수 있는 거, 이게 얼마나 큰 변화라는 건 아마 휠체어를 타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를 거예요.”

- 스쿠터를 타고 어디를 가시는데요?

“제가 가장 단골로 가는 곳은 우리 동네에 있는 대형마트인데요. 우리 아파트에서 먼 곳이 아닌데도 휠체어를 혼자 밀고 가기엔 엄두를 못낼 거리에 있거든요. 아시다시피 여긴 생활용품부터 간식거리까지 모든 게 다 있는 대형마트잖아요. 저는 스쿠터로 드라이브할 때면 필수로 들리곤 하죠. 이전엔 필요한 게 있으면 늘 다른사람에게 부탁해야 했고, 깜빡 잊고 안 사왔다고 해도 부탁하는 입장에서 화도 못내고 혼자 삭여야 했는데요. 이젠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제가 직접 골라서 가장 좋은 건 필기도구예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연필 탓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저도 내 맘에 드는 펜이 있음 공부 더 잘할 거 같은 그런 착각에 빠져 사는 사람이거든요. 하하. 내 눈으로 보고 문구 용품을 고르게 되니까 어찌나 좋은지…. 좋아하는 맛있는 거 사먹으면서 스쿠터 타고 쇼핑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아요. 아프기 전에 두 다리로 걸어다니며 쇼핑할 때랑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답니다. 스쿠터 타는 재미는 휠체어 타는 것과는 또 다른 자유가 있거든요. 스쿠터 운전 실력도 이제 많이 늘었고요.”

- 장애인의 삶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소신을 갖고 계신다고요?

“가장 먼저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예를 들면, 건강, 시간, 그리고 평범한 것들의 중요함과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전 특히나 뇌사상태로 40일간을 있다가 깨어난 거니까 두 번의 삶을 산 거니만큼 ‘최선을 다하자!’라고 항상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저에게 긍정적이라고 하던데, 제 생각엔 단순해서 그런 거 같아요.” (끝)

*예다나 기자는 ‘장애 경력 18년’을 자랑하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입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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