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동숭동에 위치한 노들야학 사무실에서 박경석 대표가 욜로팀을 상대로 강연하고 있다. ⓒ하지혜

‘내 모습 / 지옥 같은 세상에 갇혀버린 내 모습 / 방구석에 폐기물로 살아 있고’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시 부르는 ‘공간이동’이란 노래의 일부다. 90년대 민중가수들에 의해 탄생한 이 노래에 대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당시 중증장애인들의 삶을 잘 묘사했다”고 평가했다. 지난 23일 노들야학 사무실서 이뤄진 욜로팀과의 만남에서다. 이 자리에서 박 대표는 ‘진보적 장애운동’이란 주제로 약2시간동안 강연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증장애인의 외출은 제한돼있었다. 2001년 이전의 보건복지부(현 보건복지가족부)의 통계를 보면, 중증장애인 중 70.5%가 한 달에 5번도 외출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애인들의 외출을 막은 가장 큰 장애물은 ‘이동권’이었다. 당시엔 지하철 내 엘리베이터의 설치나 저상버스의 도입 등 장애인 이동편의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건 2001년도다. 같은 해 1월 22일 오이도역서 장애인이 리프트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계기가 됐다. 박 대표는 “사람이 떨어져 죽었는데 역측은 ‘유감이다’라는 한마디만 했다”며 “그러나 우리를 보호해줄 법은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공공시설물 관련법이 리프트 설치만을 의무화하고 있어서다. 따라서 역 측에는 어떠한 법적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정부가 리프트 설치만을 의무화한 것을 두고 박 대표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리프트 설치가) 다른 시설보다 돈이 덜 든다”며 “결국 그들은 장애인에게 돈을 쓰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본주의가 꼭 옳은 것은 아니다”라며 이윤추구, 시장자유, 경쟁을 중시하는 자본주의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근본이유”라고 말했다. 진보적 장애운동이란 자본주의 속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찾기 위한 것이다.

‘장애인이 이동하기 좋은 나라’의 건설을 위해 박 대표는 2004년까지 이동권 투쟁을 이어나갔다. 장애인들이 똘똘 뭉쳐 버스를 막고, 철로에 내려가 지하철 운행을 정지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한 결과, 2005년 1월 「교통약자편의증진법」의 제정으로 현재 서울 소재 지하철역의 90% 이상이 엘리베이터와 스크린도어를 설치했으며, 장애인콜택시 350대와 저상버스 25%가 서울을 활보하고 있다. 박 대표는 “다만 서울시 저상버스는 2013년까지 50%가 도입될 예정이었으나, 4대강 사업 때문에 예산이 깎여 이행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들어냈다.

이동권 투쟁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자 박 대표는 ‘장애인 활동보조 서비스’를 제정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2005년 함안서 수도관이 터져 중증장애인이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됐다.

박 대표는 “이 사건은 도와주는 사람 한 명만 있었으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의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정부가 같은 해 15억으로 6개월 동안 활동보조서비스를 시범운영하게 된 거다. 이듬해엔 이 사업을 1년으로 늘렸다. 하지만 예산은 그대로였다. 이에 열 받은 박 대표는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시청 앞에서 시위를 했다. 26일째 되는 날에는 39명이 삭발까지 했다. 그러던 중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7000억을 들여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하겠단 계획을 발표했고, 자극 받은 시위대는 노들섬이 있는 한강대교를 6시간 동안 기어가는 시위를 했다.

결국 2006년 5월 1일 서울시가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포기하고, 활동보조서비스를 전면 시행했다. 그 후, 그들은 다른 도시를 돌면서 활동보조 제도화 약속을 받아냈다.

지방정부들이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자 중앙정부도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 대신 2007년 중앙정부는 자부담 10%를 내야하고, 한 달에 받을 수 있는 시간을 최대 80시간으로 제한하며, 차상위 200%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안을 내놨다. 장애운동가들은 국가인권위 원회를 점거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23일째 되는 날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차상위 200%안을 폐지하고, 한 달 최대 180시간을 받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자부담은 폐지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강연 마무리서 “참 많은 운동을 했다”며 “권력의 배를 째면 언제나 돈이 나왔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에 인색했던 자본주의 국가에서 장애인을 위해 돈을 쓰게 한 건 박 대표와 같은 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살기에 불편한 게 많다”며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글은 ‘2013 장애청년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 ‘욜로’팀의 심지용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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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용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대학생 페이스북 페이지 ‘나도 칼럼니스트’에 5년간 기명칼럼을 연재했다. 2013년 12월부터 1년 간 KBS <사랑의 가족> 리포터로, 2017년 5월부터 약6개월 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블로그 기자로 활동하며 장애 문제를 취재해 사회에 알리는 일을 했다. 장애 청년으로 살며 느끼는 일상의 소회와 장애 이슈에 대한 생각들을 칼럼에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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