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두영 화백 ⓒ방두영

침묵 속으로

우리나라 장애인 미술계의 초석이 된 방두영 화백은 1947년 남한강가의 단강리라는 강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복하고 넉넉한 집안 환경 속에서 어려서부터 영민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학교에서도 늘 우등생이었던 그의 어린 시절은 마냥 즐겁고 행복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이주하여 서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강마을이 늘 그리웠다. 그런데 그의 불행은 바로 강물에서 보낸 즐거웠던 유년 시절에 시작되었다.

귀에 물이 들어가 중이염이 생긴 것이다. 중이염을 치료하다가 더 악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중이염에 좋다는 약을 우측 귀에 넣었는데 그것이 안으로 썩어 들어갔다.

초등학교 졸업 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귓속을 완전히 도려내는 2차에 걸친 대수술 후, 우측 귀는 농, 우측 안면마비, 좌측 청각장애로 그는 침묵 속에 갇히고 말았다.

작품1 ⓒ방두영

미술과의 만남과 창작 활동

어린 그에게 닥친 아픈 상처는 그를 한동안 위축시켰지만 오히려 어린 나이에 불같은 의지를 갖게 해 주었다. 한동안 문학가의 꿈을 안고 세계 유명작가들의 문학작품들을 모두 찾아 읽으며 습작을 하였으나, ‘언어란 소리의 미묘한 차이에도 많은 감정의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잘 듣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 미묘한 감성적 변화를 잡아 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자기 질문을 놓고 오랜 시간 깊은 침묵 속에서 고민하다가 소리와 무관한 미술작가로 진로를 변경하고 미술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17세 가을이었다. 새로운 꿈을 향한 무섭도록 집중적인 공부가 시작되었고, 다행히 운명의 신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미술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을 알게 되고 그들과 같은 화실에서 밤을 새워 미술의 기본인 데생을 공부하고 모든 미술 교재들을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애로 인해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고 대등하게 서려면 저들보다 배가 넘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집에 돌아온 후에도 다시 공부를 하였다. 그 당시는 코피를 쏟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족들이 다 모이는 추석, 크리스마스, 신정, 구정 등 명절날에는 혼자 화구를 챙겨 야외로 스케치를 하러 다녔다. 추위에 손가락이 굳어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었고, 너무 추워 숨이 막힐 때도 있었지만 정신력으로 버티어 냈다.

그 시절 한국에는 미술서적이 거의 없어서 일본의 『미술수첩』, 미국의 『Art in America, Art News』, 프랑스의 『REGARDS』지를 통해 세계 현대미술의 상황을 공부할 수 있었고, 생활비 모두를 미술서적 구입에 쏟아 넣어 굶기도 했지만 책에서 배운 다양한 미술기법을 직접 화폭에서 실험해 보면서 작품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한 노력은 미대 교수들 및 작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런 긍정 평가가 그의 의지에 힘을 실어 주었다.

청년 방두영은 198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범아협회 주최 “아시아 6개국 작가초대전”에 두 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작가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아들을 잃고 평생 작품만 하며 고독하더라도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삶이었지만 의도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1년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아들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1984년 동두천 산골마을로 이사하여 몇 년간은 산에 올라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경기 북부 최초의 미술단체인 동두천미술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1988년 추석 때 서울 누님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초교 1학년에 다니던 아들이 연탄개스로 죽는 비극이 그의 삶을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절망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벽제에서 아들을 화장해 아들과 함께 여러번 놀러왔던 한탄강에 분골을 뿌리는 순간 벼락을 맞는 듯 번쩍! 하며 멍한 상태가 되더니 눈앞의 안개가 걷히는 듯하였다.

‘아~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였구나… 이놈은 애비가 깨닫지 못하니까 깨우쳐 주기 위해 먼저 가는구나!’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강물과 겹치면서 그동안 무심히 보아 왔던 강물의 흐름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역사와 삶과 죽음의 애환이 서려 있는지를 새삼 뼈져리게 느꼈다.

그동안 한국인의 삶과 죽음의 애환이 담긴 恨(한)의 정서를 작품에 담으면서도 명확히 깨닫지 못했던 恨의 정서를 깨닫고 난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그동안 그려 왔던 형상을 지우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탄생과 소멸의 의미가 함께하는 새로운 작품으로 변모하였다.

전시회에서 방두영 화백 ⓒ방두영

추구하는 화풍

어려서부터 문학가를 꿈꾸고 수없이 많은 명작들을 읽은 것은 화가로 아주 유용한 재산이 되었다.

10대 후반에는 석고 데생을 통해 인체의 골격 구조를 익히고, 야외 스케치를 통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를 탐구하면서 사실적 작품의 기초를 쌓았고, 20대 초부터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은 탐구를 하였으며,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우리 한민족의 역사와 삶의 궤적들을 연구하며 우리의 감성에 스며 있는 恨의 정서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미술작업에 있어 다양한 표현을 위한 여러 가지 기법들을 실험하면서 서서히 구상과 추상이 혼합된 화풍으로 많은 작업을 하였다.

작품2 ⓒ방두영

한국장애인미술협회 창립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1991년부터 장애인 문화예술사업으로 한국장애인미술대전 공모가 시작되어 장애인화가들의 존재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홀로 고군분투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한 자신의 어려움이 생각나 작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전시 기회를 열어 주고 같이 어울려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하는 모임을 만들면 후배들은 좀더 쉽게 작가의 길을 갈 수 있겠기에 부산, 광주, 전주, 대구 등 전국을 돌며 장애인화가들을 만나 뜻을 모았다.

1995년 12월 서울역앞 벽산빌딩 강당에서 한국장애인미술협회 창립총회를 거쳐 초대회장으로 한국장애인미술협회의 첫발을 내딛었다. 한국장애인미술협회 출범에는 벽산건설 및 한국기독교미술협회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1996년 드디어 한국장애인미술협회의 창립전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97광주비엔날레에 세계비엔날레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장애인화가들만의 특별전 ‘여백의 한자리전’이 23명의 장애인화가들이 출품하여 비엔날레 담당자로부터 본 전시와 5개의 특별전, 5개의 기념전 중 본 전시에 이은 가장 훌륭한 전시였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 결과로 다음 비엔날레에도 장애인화가들의 전시가 이루어졌다.

2005년에는 미국 LA 한국문화원 전시실에서 한국 장애인화가 35명의 작품으로 ‘고난을 극복한 작가들전’을 열었다. 현지 언론의 대대적인 전시행사 보도로 역경을 딛고 일어선 한국장애인화가들의 의지가 현지인 및 교포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 외 한·중·일 장애인화가 교류전으로 일본 후쿠오카시를 장애인화가들을 인솔하여 방문하는 등 국내외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이후 회장을 물러나고 후임 김충현 회장 체제의 한국장애인미술협회는 사단법인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되면서 한·중·일 미술교류전, 장애인미술가의 희망축제한마당,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장애인아트페어, 국제 장애인미술대전 등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면서 많은 장애인화가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애예술인으로서 삶은 힘들다

그는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고, 작품성을 인정받아 각 미술 분야에서 많은 상을 받을 만큼 작가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하였지만, 학맥과 인맥이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작가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작품성 인정으로 년 4, 5점의 작품 판매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생활은커녕 작품을 계속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환경이다. 이를 악물고 지금껏 버텨 왔지만 앞날이 보이지 않자 힘이 빠진다.

정부가 장애인 복지정책으로 장애인 문화예술 발전을 도모한다면 검증된 장애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작품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 안정적으로 작품에 전념해서 예술가로서 한국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작품3 ⓒ방두영

일반 미술계에서의 활동

1985년 동두천미술협회 창립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1990년 경기북부 현대작가회를 조직하여 경기북부 4개 지역에 매년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현대미술을 선보이고 소요산 환경예술제를 개최하여 평론가들로부터 경기도의 가장 훌륭한 단체로 선정되었다.

2002년 캐나다 밴쿠버의 Vergil Canada 개관 기념 초대 개인전을 통해 한국 작가 최초로 써포팅 멤버쉽을 취득하였다. 미국 시애틀과 LA에서의 초대 개인전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 태국, 이태리, 중국, 프랑스, 캐나다 등 해외에서의 왕성한 활동과 한국 대표작가 초대전(세종문화회관), 경기도 대표작가 초대전(남송미술관), 광복 70주년 남북 대표작가 초대전(경복궁 미술관), 한국 현대미술 초대전(프랑스) 등 16회의 개인전과 400여 회의 국내외 기획초대전 및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국제미술전문지 『Vergil America』 봄호에 표지작가로 선정되어 10점의 작품이 특집으로 수록되었다.

그의 활동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2016년 경기도 미술관 10주년 기념 ‘거장의 향기를 찾아서’ 전시회에 10명의 거장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대표작 20점으로 두 달 동안 경기도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였으며, 그의 동양적인 사유와 은유를 품은 독특한 화풍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동양미술의 깊이를 알리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미술전문지 아트코리아 발행인이며 평론가인 고(故) 김남수 주간은 2002년 캐나다 초대개인전 서문에 ‘우주의 신비를 깨치고 자연과의 묵시적 교감을 작품으로 승화…, 無와 恨의 실체를 찾아서 한탄강을 소재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와 삶을 그려…’라고 그의 작품을 분석하였고, 평론가 이섭은 ‘실존으로부터 無와 生命을 성찰하다’라는 제목으로 ‘방두영만큼 예술을 확고한 자신만의 어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고 평하며, ‘방두영은 철저히 자신의 체험을 통해 걷어 올린 사유의 결과만을 작품으로 옮긴다’고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을 체험하고 살아왔는지를 은연중에 밝히면서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넘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 이 땅에 살아가는 모두에게 깨끗하고 행복하고 밝은 기운을 주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사)한국미술협회 서양화 1부, 2부 이사를 역임하며 어려운 장애인 작가들의 회비 면제를 이루어 냈고, 한국미협 동두천지부장 및 경기북부 협의회장을 지내면서 경기도 평화통일 미술대전을 만들어 집행위원장 및 대회장으로 경기 북부 미술의 지대한 발전을 이끌어내어 지역작가들의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

그동안 작가로 살아오면서 극심한 어려움을 많이 겪어 왔기에 누구보다 장애예술인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그는 장애예술인들이 안정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장애예술인지원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기로 작심하였다. 개인적인 계획은 그동안 살면서 깨달은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들을 커다란 대작으로 남겨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잠시나마 마음의 상처를 잊고 맑고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고 싶다. 그동안 그려온 많은 작품 중 대표작들을 전시할 기념전시관을 마련하여 작가로서 사회에 기여할 의무를 다하고 작가로서의 삶을 행복하게 마치려 한다.

# 주요경력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고문, (사)한국미술협회 자문위원·특별위원회 장애인미술위원회 위원장

(사)한국미술협회 경기도지회 자문위원, 경기 국제미술창작협회 자문위원장

한국장애인미술협회 회장, 제2회 국제장애인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경기북부 현대작가회 창립 초대회장 역임

1998년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추천작가 인증

한국작가 최초 써포팅 멤버십 취득(캐나다미술협회)

2012년 Vergil America 표지작가 선정(미국, 국제미술전문지)

2012년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특별상

2003년 한국문화예술 공로상, 경기문화예술 대상, 2004년 동두천 문화체육장

2006년 제1회 장애인문화예술상

2010년 한국장애인미술협회 20주년기념 공로패

2014년 한국미술인의날 특별공로상

2017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대통령상

개인전-16회(한국, 미국, 캐나다 등 해외 초대전 6회)

단체전-국내단체전, 중국,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해외 초대전 포함 400여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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