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국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김수한 센터장. ⓒ한국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자동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버스 광고판에, 건물 전광판에 한국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광고가 나온다. 김수한 센터장이 센터를 맡으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홍보 방식이다.

김수한 센터장은 곱상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로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대화법으로 상대를 설득시키는 장애인계에 흔치 않은 신사이다. 그런데 희끗한 머리로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놀랍게도 그는 40대이다. 아주 젊은 리더이며 생계형 유학파로 영어가 유창하고, 부인이 대만 사람인 다문화 가정이다. 게다가 그는 20대부터 장사를 한 골수 기업인이다.

그가 우리나라 장애인기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데, 김수한이란 사람이 장애 속에서 살아온 라이프 스토리를 알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Q: 한국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센터장으로 취임하여 한 일은.

A: 지난해 4월 18일에 취임식을 마치고 가장 먼저 16개 지역에 있는 지역센터를 3주 동안 순회를 하였다. 각 지역센터마다 창업보육실이 있는데 그곳에 138개의 장애인기업이 있다. 지역센터를 방문하여 현장을 둘러보고 간담회를 개최하여 이용자 욕구를 직접 들었다.

잘 운영되고 있는 지역센터도 있었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든지 편의시설이 미비하여 창업보 육실이 활성화되지 않은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장애인기업의 인프라 부족 이다. 장애인기업 간에도 연계가 부족하고 비장애인기업과의 파트너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사업을 하려면 정보가 빨라야 하는데 우리 장애인기업은 고립되어 있다. 이해긍 센터장의 유고로 너무나 갑작스럽게 센터장이 되어 한동안은 실태를 파악하며 문제점을 찾아내는데 주력하였다.

Q: 센터 설립 단계부터 참여했던 것으로 안다.

A: 한국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재단 설립 이사로 참여하였다. 장애인에게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자립인데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0년대에는 시계, 보석, 인장 등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업종들이 바뀌어 가면서 장애인 기업이 탄생한 것인데 말이 기업이지 영세하기 짝이 없다.

사업을 하다가 빚만 잔뜩 져서 재기 불능 상태가 되는 장애인기업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장애인기업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였다. 재단의 주무 부처는 중소기업청(현재 중소벤처기업부) 이다.

다행히 2008년 복권기금 100억원으로 장애인기업활동촉진법에 따라 재단을 설립하고 지금의 건물을 매입하여 창업을 원하는 장애인들에게 사무실을 제공하고 운영 전반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1대 센터장은 안대영, 2대와 3대 센터장은 이해긍이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말 이해긍 센터장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재단 임원은 물론 직원들이 충격에 빠졌었다.

Q: 4대 센터장으로 세운 목표는.

A: 산업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그 변화를 준비하지 못하고 같은 프로그 램을 실시하고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뒤쳐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새로운 아이템 개발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요즘 어딜 가나 4차산업 혁명을 얘기하는데 나는 이것이 장애인에게 기회라고 생각한다. 4차산업이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제약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장애인이 갖고 있는 물리적인 제약이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조건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아직은 꿈 같은 얘기다. 그동안 센터는 양적인 팽창을 해 왔다. 이제는 질적 향상에 집중할 것이다. 장애인기업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애인기업이 돈을 벌 수 있는 사업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기업은 장애인복지시설이 아니다.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 정책과에서 여성과 장애인기업을 담당하고 있는데 거의 비슷한 정책이지만 장애인기업은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을 잘 살려나가는 것 또한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Q: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

A: 1970년생이다. 아직 40대이다. 너무 젊다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사회에 일찍 나왔다. 생후 6개월에 고열로 전신마비가 왔는데 지금 온전한 것은 왼쪽 팔뿐이다. 오른쪽 팔은 어깨 부분에 힘이 없어서 제 기능을 못한다.

초등학교는 특수학교인 삼육학교에 다녔고, 중학교는 일반학교인 반포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다 가정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져서 고등학교는 다시 삼육으로 갔다. 졸업 후 취업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는 장애인의무고용제도 실시 전이라서 취업이 어려웠다. 집으로 돌아갈 환경이 아니어서 일산에 있는 직업전문학교에 입소하여 인쇄기술을 배웠다.

Q: 호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은.

A: 인쇄 기술을 배운 덕분에 충무로에 있는 편집실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는 매킨토시를 사용해서 작업을 하였는데 편집 일을 정말 열심히 했다. 4년 동안 근무를 했지만 승진이 되지 않았다.

나보다 뒤에 들어온 후배들은 1, 2년이 지나면 차장, 과장 직위로 선배인 나를 부리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들은 대학 출신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하지만 대학 입시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당시는 장애인특례입학제도도 없었다. 마침 호주에서 사회복지 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어서 무작정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부모님의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회사에 근무하며 모은 돈과 퇴직금으로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결행하였다. 영어 회화는커녕 단어도 중학교 수준이었지만 6개월 어학연수를 마치고 호주 남단에 있는 FLINDERS UNIVERSITY SCREEN STUDIES에 입학하였다. 내 꿈은 영화 극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호주에서 4년 동안 대학에 다니면서 나는 공부보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호주 한인방송에서 아나듀오(아나운서, 피디, 엔지니어)로 일주일에 한 번씩 1시간 동안 방송을 하게 되서 꿀을 사다가 이민자들에게 파는 사업을 하는 분을 만났는데 그 사장님이 나에게 학생들을 대상으로 꿀장사를 해 보도록 하셨다.

그것이 내가 사업에 눈을 뜬 계기가 되었다. 난 돈을 벌어야 생존할 수 있는 처지였기에 바로 장사를 시작하였다. 유학생들은 공부에 지쳐 늘 피곤하였기에 달달한 꿀을 복용하곤 하였는데 그것을 본 호주 학생들도 간혹 꿀을 주문하곤 하였다.

그 당시는 한국에 유학 붐이 불어서 한국에서 오는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한국에 있는 유학전문업체의 상담을 받고 왔지만 막상 호주에 오면 그 상담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현지인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내가 바로 그런 에이전시(agency) 역할을 하고 수수료를 받아서 학비를 마련하였다. 1995년 내 나이 25살,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치열한 시기였다.

(재)한국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김수한 센터장. ⓒ한국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Q: 결혼을 드라마처럼 했다고.

A: 유학생들은 세어하우스(share house)에 많이 살았다. 아내는 세어하우스 동창이다. 대만에서 유학을 온 것이다. 내가 1년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이것저것 정보 삼아 알려 주었다. 나보다 4살 아래여서 내 눈에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그저 친구로 생각했다.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데이트임에는 분명하였지만 그래서 그녀를 좋아하고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혼은 감정만 갖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기 때문에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많은데 나는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서 섣불리 결혼을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그녀보다 1년 먼저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졸업 후 대만으로 돌아가 외국계 큰 회사에 근무하며 바쁘게 지내는 듯하 였다. 나는 뭔가를 해 보려고 힘겨운 도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편지에 답장도 정성껏 하지 못했다. 그런데 2008년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한국에서 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서 나에게 온 그녀를 나는 거부하지 못했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결혼을 하였고, 지금 그녀는 내 아내로 내 옆을 지키고 있다.

Q: 김정록 前 의원과 친척이라고 들었다.

A: 작은아버지이다. 작은아버지는 어렸을 때 기차 사고로 발목이 절단된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사업가로 성공하셨고, 故 장기철 회장의 권유로 장애인복지계에 들어와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회장,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 등을 지냈다.

19대 국회에 장애인비례대표로 들어가 시겠다고 했을 때 나는 말렸다. 작은아버지는 장애인기업을 대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아버지가 사업가로 장애인기업의 기반을 다져 주시길 바랬다. 작은아버지는 정치 때문에 잃은 것이 너무나 많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신데 가슴이 아프다.

Q: 센터장으로 선임되기 전에도 장애인 고용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A: 개인사업을 두 번 했었다. 한 번은 자동차 부품 제조업 회사인 케이아이테크인데 7년 동안 매출이 꾸준히 증가하며 안정적으로 운영을 했다. 그러다 2008년 한미FTA로 자동차 분야가 직격탄을 맞았다. 기본 자본이 있었다면 고비를 넘겼을 테지만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인건비와 운영비를 마련하지 못해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일을 하면 정치에 따른 기복이 너무 심해서 기술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호주 기술인 필름을 이용한 혈당스트립을 한국에서 상용화하여 당뇨병 환자들이 손쉽고 정확하게 혈당 체크를 할 수 있는 사업을 하기 위해 주식회사 이스터랩을 창사하였다. 그런데 다국적 기업이 독점하고 있어서 한국 생산이 불가능하였다. 3년 만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두 번의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며 절절히 깨달은 것은 돈도 빽도 없는 장애인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애인기업을 지원해 주고 보호해 주는 울타리와 때때로 몰아붙이는 비바람을 막아 주는 우산 역할을 하는 장애인기업지원제 도를 마련하는 일에 앞장섰다.

(사)장애인생산품판매지원협회 아름다운사람들 소장, (사)전국장애인표준사업장연합회 상임이사로 활동하였다. 2011년부터는 호주에서 한인방송을 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KBS-3라디오에서 장애인 창업에 관한 방송도 하고 있다.

Q: 장애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일자리인데 아직 장애인 취업은 어려움이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A: 장애인의무고용제도의 효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고용 시장이 확대되지 않는 경제구조에서 장애인의무고용율만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용 시장을 우리 손으로 만들기 위해 창업 시장을 확대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4차산업 혁명으로 향후 5년 안에 5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20년까지 12개 신산업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는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도 신개념의 장애인 직종을 창출하는 것이 시급하다.

제4대 센터장 취임식. ⓒ한국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Q: 2018년 새해 센터의 계획은.

A: 일단 스마트팜을 시작하려고 한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사람은 먹어야 살기 때문에 1차산업은 쇠퇴가 없다. 다만 어떻게 재배하는가 하는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기존 하우스 재배는 노동력이 요구되었지만 스마트팜은 사물인터넷 기술로 자동화된 농장이기 때문에 장애가 노동력 약화 조건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스마트팜을 설치해 주고 농협을 통해 판로를 개척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리고 기업의 성공은 기업에서 생산한 제품을 얼마만큼 팔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데 장애인기업은 내수가 약하기 때문에 수출을 해야 한다.

국내 소비자들은 장애인 생산품에 대한 편견이 있지만 해외는 오히려 인센티브가 있어서 이제 장애인기업도 수출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그 첫 번째 타겟으로 중동 두바이를 공략하려고 한다.

새해는 국내외로 판로를 개척하는 세일즈맨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부족한 공부를 하기 위해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창업경영컨설팅학과에 입학을 했기 때문에 학업에 전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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