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걸 시인 ⓒ손병걸

가난에서 벗어나기

손병걸은 1967년 강원도 대관령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에게 대관령은 흰 눈밭으로 둘러싸인 낭만적인 장소이지만 그에게 대관령은 사회로부터 단절된,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유배지였다.

늘 추웠고, 항상 배고팠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공납금을 내지 못해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학교에 가면 또 공납금 독촉을 받을 텐데 싶어 일부러 천천히 걸어서 학교로 향하였다.

그러다 보니 지각도 많고, 공부도 못하는 변변치 못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해방감이 느껴졌다.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뻤다. 졸업 후 취업을 생각했지만 도시와는 달리 젊은 사람들이 일할 곳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밥만 축내는 식충이나 다름이 없기에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집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탈출 방법은 오직 하나 군 입대였다. 당장 입대가 가능한 곳이 특수부대여서 고된 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손병걸은 삼시세끼 배불리 밥 먹고 집안 걱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강한 체력과 강인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뎌 낼 수 없는 훈련을 받고, 크고 작은 작전을 성공시키면서 어느덧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대한민국 사나이로 거듭났다.

작가와의 대화에 참석중인 손병걸 시인 ⓒ손병걸

짧은 행복, 긴 고통

제대 후 부산에 정착해 직장을 얻었다. 경호전문 대기업으로 아주 좋은 직장이었다. 그 당시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목표는 오로지 그녀와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혼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서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녀가 아내라는 자리에 흔쾌히 와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닮은 딸이 태어났다. 더없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릎, 발목 등 관절에 통증이 생겼다. 처음에는 무리를 해서 그런가 보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특수부대 출신들이 고된 훈련으로 골병이 들어 몸이 안 좋다는 얘기도 있고 해서 그런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 관절염 증상은 ‘베체트씨병’의 시작이었다.

‘베체트씨병’은 온몸의 뼈마디마다 고름이 생겨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생사를 오가다가 통증이 잦아들면 시력이 점점 떨어져 시각장애가 발생하는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그렇게 이상한 병이 손병걸에게 닥쳐올 줄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발병한 지 1년 만에 그의 눈에서 빛이 완전히 빠져나가 그는 암흑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때가 1997년,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결혼한 지 3년째로 딸아이가 겨우 3살이었다.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손병걸은 이미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고,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커져 있었다.

당장 생계를 위해 부인은 식당 일을 하며 어린 딸과 앞을 볼 수 없게 된 시각장애인 남편을 보살피느라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죽음을 선택하였지만 그의 자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죽을 수도 없다면 살아야 하는데 살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사랑이 컸던 만큼 증도 많았던 이혼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어린 딸과 함께 누나가 살고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좌-손병걸 시집. 우-강의 중에 기타를 켜며 노래를 부르는 손병걸 시인 ⓒ손병걸

문학과의 만남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절망 속에서 그는 희망을 건져올렸다. 바로 문학이었다. 자신의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를 쓰고 또 썼다. 손병걸에게 문학은 그가 사춘기를 맞닥뜨리면서 찾아왔다. 펼친 책 속에 푹 빠져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던 그는 밤이면 문자의 세계에서 놀았다.

하지만 집안 살림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꿈이 사치 같아서 이별할 수밖에 없는 문학을 남몰래 끌어안고 흐느낄 정도로 문학을 사랑하였다. 두 눈의 시력을 잃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문학에 전부를 걸었다.

손병걸은 내가 왜 지금 와서 시를 쓰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수없이 하였다. 손병걸에게 있어 문학은 무엇인지 찾아내지 않고는 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피를 토하듯 삶에 대한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우울한 노출증 환자가 되어서는 곤란하고, 주어진 삶에 대한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긍정이 있어야 했다.-

투병 당시 쓴 시가 2천여편이 되는데 그런 습작의 결과 2003년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을 통해 3회 추천을 받았고,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 ‘항해’가 당선돼서 당당히 문단에 데뷔하였다.

시집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문학도서)를 발표하였다. 시집을 내면서 문학에 대한 갈증이 더 커졌다.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알고 싶은 지적 욕망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그는 건강했던 시절도 하지 못하였던 대학 교육을 시각장애를 갖게 된 후 도전하였다. 2006년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거쳐 2010년 같은 대학교 문화창조대학원에서 미디어문예창작을 전공하였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

엄마 없이 아빠 손으로 키우기로 했을 때 3살이던 딸이 어느덧 22살 처녀가 되었다. 아빠의 눈이 되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살아야 할 이유로 희망을 주는 귀한 존재이다. 아빠 직업이 시인 그것도 시각장애 시인이라는 것은 가난을 의미한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시집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사치이다. 원고 청탁 원고료가 용돈이 된다는 것은 사치보다 더 심한 허영이다. 그나마 딸에게 “아빠가 오늘 치킨 쏜다.”라고 큰소리를 칠 수있는 것은 강사료를 받았을 때이다.

그는 가끔 버거운 글쓰기를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일, 강의를 위해서이다. 자리에 따라 주제가 다르지만 그가 되도록 빼놓지 않는 이야기는 더하고 빼고 할 것이 없는 바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다.

손병걸의 강의는 한 편의 뮤지컬 같다. 기타를 켜며 이야기를 하다가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만의 장점인 시낭송도 한다. 그는 자신의 시를 완벽하게 외워서 감정을 넣어 낭송한다. 그의 시낭송을 들은 사람은 가슴을 울리는 그의 한 맺힌 듯한 목소리에 푹 빠져 시낭송의 묘미를 느끼게 된다.

고등학교 때 잠시 잡았던 기타를 시각장애를 갖게 된 후에 완벽하게 배웠는데 기타가 손병걸 취미 생활을 넘어 공연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시를 쓸 때가 손병걸은 가장 멋있다. 그는 그 어떤 삶도 절대다수의 행복을 위하여 긍정해야 하고 그래서 자신이 쓰는 문자들이 힘찬 문장으로 일어서기를 원하며 그것으로 모든 슬픔이 맑아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힐링 시인이다.

# 주요 경력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외.

# 수상 경력

2003『 솟대문학』 추천완료(시) 2004 동아일보 백병원 주최 투병문학상 2004 밀알문학상 2005 부산일보 신춘문예 가작 2006 제10회 구상솟대문학상 본상 2007 민들레문학상 대상 2008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우수상 2009 전국장애인근로자문학상 금상 201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표현활동 및 창작지원금 수혜(복권기금 조성 시집 발간) 2011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국무총리상 2011 2분기 대한민국 우수문학도서 선정 2013 건양병원 김안과 주체-마음으로 보는 세상 문학상 대상 2013 대한민국장애인음악제 작시 부문 대상 2013 중봉조헌문학상 대상 외.

# 저서

시집 - 푸른 신호등(문학마루, 2010) 시집 -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애지, 2011) 시집 - 통증을 켜다(삶이 보이는 창, 2017)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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