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병변장애 배우 길별은.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배우라고 하면 사람들은 외모가 빼어난 인기 스타를 떠올린다. 그래서 장애인은 배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배우는 사람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스크린을 통해 보여 주는 연기자여서 배우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집단이다.

그 다양성 가운데 장애가 포함되어야 하기에 장애인 배우가 필요하다. 하여 뇌병변장애 배우 길별은의 존재는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다양성의 표상이다.

김인문 선생님, 동료연기자들과 함께.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연기를 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어렸을 적 내가 본 세상은 엄마 등에 업혀서 간 시장이 고작이었습니다. 시장에 가면 구경할 것이 많았죠. 사람, 물건, 음식 등 정말 볼 것이 많아서 신이 났습니다.

6~7살 무렵 엄마 등에 업혀 영화관에 갔습니다. 어둡기 만한 영화관이 싫었죠.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신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였는데 커다란 화면 속에서 원더공주가 악당들을 통쾌하게 물리치며 멋지게 달리고 하늘을 날아다녔죠.

그때 나는 화면 속의 원더공주가 진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엄마는 처음으로 밝게 웃는 나를 보고 기뻐하셨고,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내게 어려운 집안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흑백TV를 사 주셨습니다.

이후에도 엄마는 시간이 나실 때마다 나를 데리고 영화관에 가 주셨고, 혼자서 다니게 된 후에는 거리에서 영화 간판만 보일 정도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죠. 영화를 동경하며 ‘언젠가 나도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에게 배우의 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연기 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연기 공부를 별도로 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많이 본 것이 큰 공부가 됐습니다. 지금까지 1,500여편의 영화를 봤는데 그 속에서 만난 다양한 캐릭터가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어요. 배역이 들어오면 바로 저장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때 그 배우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연기했지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해야지 하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내죠.

하지만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연출가가 시키는 대로 무대에 섰죠. 아주 작은 단역이었어요. 내가 배우였는지조차 모르는 관객이 더 많았을 겁니다. 그러다 대사 한 마디를 받게 되었어요. 너무너무 기뻤죠. 그러나 바로 언어장애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버퍼링(중간중간 끊김)을 극복해야 했었고, 사람들은 나에게 정확하게 발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배우의 꿈을 가진 뒤 경험한 첫 번째 좌절감과 두려움이 나를 위축시켰습니다.

동료 배우들이 ‘장애인이 배우를 하느라고 고생 많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정말 배우의 길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지금은 나의 동료인 배우 강민휘 군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기획사에서 배우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훈련을 받으며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나의 프로필과 소개서를 기획사 메일로 보냈고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기획사에서 나를 받아 주었어요.

나는 기획사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연기 훈련을 받았어요. 그곳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인문 선생님을 만난 것은 내 연기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배우로서의 기본적인 틀을 잡게 되었습니다.

매일 오전마다 3~4시간 발성과 발음 연습을 꾸준히 하고 선생님께 직접 연기 지도를 받았거 든요. 그리고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봅니다. 영화를 보며 나 같으면 이렇게 연기를 했을 텐데 하고 나 자신에게 맞춰 보며 분석을 합니다.

어떤 작품으로 데뷔를 했는지.

데뷔작은 서울예술단의 <크리스마스 캐럴>입니다. 2004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려진 연극인데 내가 맡은 역할은 유령이었는데 정말 유령 같았다고 칭찬을 들었어요.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고… 단역이었지만 성공적인 데뷔였어요.

tvN 출연작 <갑동이> 스틸컷.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영화, 연극, 뮤지컬, CF… 정말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개인적으로 어느 장르를 좋아하는지.

저는 특별히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 공간에 갈 수 있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장애 때문에 경험해 보지 못한 아쉬움이 많은 것 같아요. 2014년 출연한 tvN드라마 <갑동이>처럼 액션 추리극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역을 맡고 싶습니다. 뮤지컬, 연극, CF도 각각의 매력이 있죠. 저는 연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공연은 NG가 허용되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가.

언제나 무대와 스크린은 내게 기분 좋은 부담을 주죠.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고자 쉬지 않고 연습하고 대본을 분석합니다. 특히 버퍼링을 극복하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대본 리딩에 쏟아붓습니다.

나와 함께 연기하는 비장애인 배우와 더 좋은 호흡을 맞추어야 서로의 연기가 살거든요. 내가 NG를 내면 비장애인 배우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이 제겐 더 큰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대본을 완전히 숙지할 때까지 절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의 대본은 언제나 너덜너덜 닳아 있습니다.

연기 생할 10년이 넘었는데 가장 자신 있는 캐릭터는 무엇인가.

배우에게 있어 자신 있는 캐릭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매 작품마다 역할이 주어질 때마다 제가 그 사람이 되어 생각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같은 캐릭터는 없죠. 작품 하나하나 캐릭터가 다르기 때문에 자신 있는 캐릭터가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제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는 역시 내 장애겠죠.

배우 성동일 씨와 함께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장애 때문에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 제한적이지 않은가.

물론 장애가 있기 때문에 비장애인 배우들보다는 제한적입니다. 러나 저는 제한적인 배우로서의 환경에 실망하고 힘들어 하기보다는 ‘배우 길별은’만이 표현하고 담아낼 수 있는 역할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배우로서 관객 들과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에게 주어지는 모든 역할을 사랑합니다.

장애인 연기자가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좋은 작품을 만나 배우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겠죠. 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미국 배우 ‘피터 진 클리지’처럼 저도 당당하게 여러 방송과 감독님들에게 선택받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리나라도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장애인 배우가 다양한 역할로 출연하는 작품들이 많이 생기는 날이 오겠죠?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은.

2016년 7월 29일~30일 창작 뮤지컬 <배우수업>의 서울 공연을 마치고 11월에 있을 지방 공연을 준비하고 있고, 올 초부터 진행하는 다큐 영화 <두 배우 이야기>를 강민휘 군과 찍고 있는데 아마 촬영이 내년까지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9월 26일 영화 촬영차 영국에 갑니다. 신나는 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장애인도 배우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래야 장애인들이 다양한 꿈을 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 변화는 장애인을 접할 기회가 많아져야 가능한데 장애인을 일부러 찾아가기는 어려우니 장애인 배우를 자주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제가 하고 싶습니다. 리고 마지막으로 저로 인해 마음고생이 크신 부모님께 자랑스럽고 든든한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 주요 경력

영화

2005년 단편 <지하철> 주연, 단편 <아이엠독> 주연

2006년 단편 <위험했지만> 주연

2007년 단편 <기다립니다> 주연

2010년 장편 <독 짓는 늙은이> 조연

드라마

2011년 SBS <유쾌한 삼총사> 주연

2014년 tvN <갑동이> 조연

2014년 MBC <개과천선>

공연

2005년 연극 <초대받지 않은 방문자>

2007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 조연

2008년 연극 <날~천> 주연

2008년 연극 <쓰리컬러> 주연

2008년 연극 <크리스마스 캐럴>

2009~2010년 뮤지컬 <날개 없는 천사들> 주연

2011년 뮤지컬 <뻔뻔한 삼총사> 주연

2013년 뮤지컬 <날개 없는 천사들> 주연

2014년 뮤지컬 <노래하는 천사들> 주연

2016년 뮤지컬 <배우수업>

CF

2007년 공익광고 <소외된 사람들>

2009년 엔바이오컨스

2011년 보건복지부 광고 장애인연금보험

수상

2012년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국무총리상 수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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