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22일 지방으로 내려가기 위해 고속열차 안에서 “ 다문화 가정 며느리들의 추석”을 주제로 한 글을 읽었다.

평소 무엇인가를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여행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들고 온 것이 아니라, 열차 내에 비치된 책의 내용 중 그와 같은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몽골과 배트남 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 여성들이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게 된 과정을 먼저 소개했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인 학생과 외국인 선생으로 만나 남자친구인 지금의 남편을 따라 낯선 나라 한국으로 온 어느 여성은, 대학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며 한 가정의 며느리이자 직장인으로서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어디서든지 가장 좋은 것을 앞에 두는 것처럼, 다문화 가정의 여성을 소개한 사연 중에서 가장 앞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평범하지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이어졌다. 먼저 한국으로 간 친구가 지금의 남편을 소개해 주면서, 친구와 같은 나라에 살게 된 어느 여성, 다문화 가정 중에서도 비교적 소수에 속할 것 같은 이란에서 시집을 와 딸을 낳고 그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는 사연 등 그 내용도 가지 각색이었다.

이들은 책 속에서, “한국의 명절이 낯설었지만 이제는 적응할 만하다” 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깊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곳에 모이는 자리, 거기에서 반가워하는 남편의 가족들을 보고 나면 멀리 떨어진 자신의 부모와 형제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사연들을 하나하나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니 “ 외국인 여성 120만명 시대에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기획했다고 적어놓은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이주여성의 이야기라면 이미 지상파 방송에서 전파를 타고 있으며 기타 다른 메체에서도 단골로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등장한 것은, 다문화 가정 여성들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7월 스무 살 베트남 여성이 자신보다 배 이상 많은 한국인 남편에게 시집을 와, 일주일 만에 남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야기를 접했지만, 여전히 다문화 가정의 여성들은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같은 애기가 아니더라도 베트남 여성을 며느리로 둔 시어머니가. 주변 사람들에게 “ 돈을 얼마나 주고 며느리를 데려왔냐” 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기분이 안 좋다“ 고 방송에서 털어놓은 말은 우리의 인식이 어떤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해마다 명절이면, 열차를 이용해 고향을 다녀오는 승객이 수십만명에 이른다는 철도, 그 한가운데에 다문화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것은, 열차에 앉아 있는 시간에 한명이라도 더 그들의 이야기를 읽게 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는 “ 열차 안의 캠페인” 이라고 봐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럼 이 캠페인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었을까? 굳이 한국판 오체 불만족을 찾을 필요도, 장애를 극복하고 인간 승리의 삶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는 필요 없이, 장애 속에서도 가족과의 갈등을 극복하고 한 인간으로써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을 찾는 것은 어려웠을지 묻고 싶다.

장애인의 날에 방송되는 “ 오뚝이 장애인 대신” “ 장애는 불가능이 아닙니다, 다만 불편할 뿐입니다” 라는 진부한 말 대신, 그렇게 느끼게 해 줄 사연 하나를 찾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이 글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서 살고 있는 독자인 정현석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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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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