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전생의 업(業)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불교의 인과론(因果論)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탄생한 윤회설에 대한 오해로 전생의 잘잘못이 현생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적인 해석이 만연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불교는 인과와 업의 개념으로 민중에게 도덕을 가르쳐왔기 때문에 인과응보를 사회에 전파시켰다. 불교의 인과설은 통속적인 인과응보설이 아니므로 불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해석이 사회적 편견을 만들었는데 그 편견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장애인이다.

이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업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티어인 카르마(Karma)는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의식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이나 생명체에 영향을 주는 행위가 업인 것이다. 업은 몸, 입, 뜻으로 짓는 세가지 업(三業)이 있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으면 업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은 인도를 들끊게 했던 극단적인 사상들과 맞서 종교적인 혁신을 일으켰다. 부처님은 무연무인론자도 숙명론자도 아니였다. 전생의 업이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는 견해를 부정하였고 동시에 과거의 업의 영향이 현재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생각도 부정하였다. 부처님은 이 두가지의 극단을 거부하고 중도의 관점에서 업을 설하였다.

그러니까 장애의 원인이 과거의 어떤 바르지 못한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숙명론적인 장애인관은 부처님이 타파하고자하는 외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애 원인의 90% 이상이 교통사고나 산업재해 등으로 인한 후천적인 것에 원인이 있다는 통계에서도 장애를 숙명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업을 만드는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불특정 다수이다. 그것을 연(緣)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혼자 만든 업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그 개인적인 업으로 판결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그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업의 필연성은 외면적인 것, 즉 신체, 남녀의 구별과 같은 외적 생물학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업의 작용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사사끼 겐쥰) 불교는 인간적 생존에 관한 종교이기에 내적인 의지를 조건으로 해야 한다. 부처님도 ‘출생을 묻지 말고, 단지 행위를 물어라‘고 하셨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아나율은 시각장애인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나율을 천안(天眼) 제일이라고 하시며 시각장애로 혜안(慧眼)을 얻었다고 칭찬해주셨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나율의 실명 원인이 잠을 자지 않으며 정진했기 때문이지 전생의 업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아나율에게 빛을 찾아주는 기적 대신 앞을 못보는 아나율을 위해 바늘귀를 끼워주셨다. 정말로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긍정적인 장애인관의 걸림돌이 되어온 업은 공업(公業)으로 보아야 한다. 최근 장애인모델로 등장한 환경적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뿐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모든 존재는 공간적, 시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생성, 발전한다는 것이 연기론이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과 고통이 곧 나의 고통과 아픔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교의 장애인관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는 원융(圓融)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장애인들이 원하는 장애인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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