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은 너무나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누구나 내가 휠체어를 타고 문 앞에서 1~2초만 서성여도 '문을 열어줄까요?'라고 물어본다. 꼭 장애인이 아니어도 짐을 많이 들고만 있어도 누군가 문을 열어주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내가 버스를 타려고 하면, 운전기사 아저씨가 휠체어 리프트를 내리고 직접 나와서 나를 도와준다. 좌석 두 개를 접고 휠체어를 고정하는 데까지 적어도 5~10분 정도는 걸린다.

그러면 버스를 타려는 승객들도 기다리고, 버스에 이미 타 있는 승객들도 불평하지 않고 기다린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상황이라 미국 사람들의 선진국 의식이 너무 부러웠다.

거리에서 마주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누구나 눈만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한다. 나는 처음에는 너무 어색해서 고개만 숙였다. 그렇지만 그런 인사에 익숙해지니 삭막한 사회에서 모르는 누군가와 웃으며 인사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미국은 정말 친절한 사람들 천지인 나라인 것 같았다.

휠체어를 타고 버스를 탑승하는 모습. ⓒ박혜정

하지만 그 이상의 힘이 드는 일은 대부분 돈에 의해 움직인다. 짐을 옮겨야 할 때, 택시에서 짐을 내릴 때, 눈이 와서 차를 밀어야 할 때, 자신의 일을 멈추고 내 일을 도와줘야 할 때 등은 모두 팁을 받아야 한다. 팁을 받지 않으면 줄 때까지 기다리고 가지 않는다.​

내가 JFK 공항에 내렸을 때, 1년 이상을 생각하고 온 짐이라 워낙 커서 옮기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 옮겨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항 수화물 찾는 곳에서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남자가 택시 승강장까지 도와줬다. 너무 고마웠다.

마침 뉴저지에 사는 사촌 형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래서 내가 형부의 차를 타려고 하자 그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언뜻 팁을 줘야 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를 줘야 할지 몰라서 그냥 3$를 줬다. 그래도 그 남자는 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형부가 10$를 주니까 땡큐! 하며 그 남자는 갔다. 팁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지만, 전혀 적응이 되지 않았다.

2주간 임시로 살던 YMCA 숙소(왼쪽)와 룸메이트로 들어가 살게 된 뉴욕의 작은 아파트(오른쪽). ⓒ박혜정

2주 동안 YMCA 기숙사에서 지내며 살 집을 계속 발품을 팔아 알아봤다. 드디어 작은 아파트에 룸메이트로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갈 아파트에 침대가 없어서 침대를 중고로 하나 샀다.

그 침대를 옮겨 주는 배달 차를 불렀는데 그 배달차 아저씨가 한국인이어서 말이 통하니 좀 부탁도 몇 가지 했다. 여러모로 고맙게 해주셨다.

그런데 말끝마다 아가씨가 팁을 많이 주겠지 라면서 부탁한 일을 해주었다. 난 가지고 간 돈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내가 생각했던 팁밖에는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저씨가 고맙게 해줬던 일들이 하나도 고맙지 않게 느껴졌다.

게다가 함께 침대 옮기는 걸 도와줬던 아파트의 경비원도 팁을 요구하는 듯 근처에서 계속 서성거렸다. 그런데 옆에 있던 그 배달차 아저씨가 팁을 줘야 아가씨가 살면서 편할 것이라고 말하는 거다. 하는 수없이, 결국 경비원에게도 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경비원도 그제야 웃었다.​

팁 문화도 적응이 잘 안 되지만,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너무나 나에게는 당황스러웠다. 그런 부분이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까지 없어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야겠지만, 처음 뉴욕에 와서 나는 정이 참 안 간다고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친절한 미국 사람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한국인의 정. ⓒ박혜정

이후에 계속 지내며 미국 사람들을 겪어 보니 정말 모두 너무 친절하고, 대부분 마음이 열려 있어서 친해지기도 쉬웠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왜 인지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국 사람에게는 한국인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친절하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그리고 가족같이 대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나눌 만한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 만큼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친절하지만 정이 없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나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박혜정

부산에서 김해로 처음 독립을 하고 아무도 모르고 지낼 때에도 이런 허전한 느낌은 아니었다. 나라만 다를 뿐,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지만, 내가 느끼는 정은 극과 극이었다.

김해 장유의 한 아파트에 이사 후, 차를 주차하고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 아파트 3층에서 빨래를 널다가 나를 보고 도와주러 내려온 아줌마가 있었다. 또한 나를 정말 친딸 같이 대해주셨던 경비 아저씨도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자주 안부를 물으며 친동생처럼 대해줬던 언니도 있었다. 휠체어 배드민턴이라는 운동으로 알게 된 분들은 정말 친오빠 이상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는 진심이 있었다. 미국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느껴볼 수 없었던 한국인의 정이었다.

한국인의 따뜻한 정이 세계 곳곳에 전파되었으면 좋겠다. ⓒUnsplash

문을 열어주는 친절은 누구나 있지만, 한국에서 느꼈던 사람들의 따뜻함과 정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의 임무 안에서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 이상은 전혀 절대 관심도 없는 반쪽 짜리 따뜻함보다 서로 간에 진심으로 정을 주고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구나 힘들고 외로운 시대인 요즘, 한국인의 정이 세계 곳곳에 전파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정을 나누는 따뜻한 세상이 되길 희망해 본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박혜정 칼럼니스트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 현혜(필명), 박혜정입니다. 1994년 고등학교 등굣길에 건물에서 간판이 떨어지는 사고로 척수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9년 동안 중증장애인으로 그래도 씩씩하고 당당하게 독립해서 살았습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혼자, 가족, 친구들과 우리나라, 해외를 누비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또, 여성 중증 장애를 가지고도 수많은 일을 하며 좌충우돌 씩씩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교육공무원으로 재직했고, <시련은 축복이었습니다>를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