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하루가 지나,중환자실을 나올 수 있었다. 정말 아프면서 봤던 장면 중에 가장 의사가 무능하고 무책임하게 보였던 순간이라, 이후로 의사들을 대하는 내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의사들의 말에 항상 의심부터 드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마침 장출혈로 또 다시 금식 명령이 떨어졌었다. 연하장애의 공포로 여전히 침만 죽기 살기로 삼켰다.

영양 공급이 어려움이 생기자 당연히 뱃줄을 다시 삽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크게 반발하였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뱃줄을 다시 삽입하고 연하장애를 가지고 살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의사들에 대한 의심도 의심이지만, 특히 연하장애에 관해서 나는 더욱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먹는 것을 못 먹는 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편히 잘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자면서도 침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연하가 마비된 다는 것은 다시 잠을 편히 잘 수 없게 된다는 말이고 항상 기도로 침이나 이물질이 넘어갈 가능성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도 힘든 수면을 더욱 더 포기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연하에 민감하다보니 뱃줄을 다시 삽입한다는 말은 연하를 다시 포기한다는 말로 들렸고 가뜩이나 의사들에게 불신이 쌓여가던 나에겐 의사들의 무능함이 연장되는 장면으로만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벌을 받았다. 정말 드라마틱하게 벌을 받았다. 장출혈이 끝나자 마자 목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금식 기간이 끝나고 겨우 죽을 먹기 시작한지 하루만에 목에 통증이 느껴졌고 이것은 검사로 이어졌다. 자세한 검사를 마치자 이번엔 식도에 천공을 뚤렸다는 기가막힌 소식이 전해졌다.

미칠 것 같았습니다. 대체 왜 끝이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나에겐 이곳이 무저갱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치 바닥이라고 생각하면 다시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그런 지옥 말이다. 의사들은 내게 뱃줄에 대한 압박을 더욱 더 주기 시작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너무 늦어버릴지도 모른 다는 식이었다.

죽을 수도 있단 말이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점점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정말 이러다 죽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뱃줄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죽고 싶었다.

그만큼 연하장애는 내게 너무 큰 고통이고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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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섭 칼럼니스트 2010년 희귀난치성 질환 류마티스성 피부근염에 걸려 후천적 장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을 오직 장애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살다. 2020년 삶의 귀인을 만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로써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장애인 당사자로써, 근육병 환자로써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를 전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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