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esteem comes from understanding our limitation and strength.(자폐인의 자존감은 우리의 한계와 강점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온다)”-Hannah Gadsby.

가끔 질문들에 마음이 베인다. 대답을 한참 골라야 한다.

“빨리 진단받고 치료 잘 받으면 우리 애도 다른 아이들처럼 정상인이 되는 건가요?”

자녀가 ‘자폐성 장애’ 진단의 기로에 선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너덜너덜한지를 잘 알지만 희망의 말들은 일부러 꾹 눌러 담는다. 그런 말들은 나중에 해도 괜찮다. 왜냐면 자폐 세계 입문 초보자에게는 자칫 희망이 고문이 되기도 한다.

‘오늘 한 자폐인을 만났다면 세상의 모든 자폐인 중 딱 한 명을 만난 것’ 이란 자폐계의 오래 된 격언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늘 자폐 아동을 키우는 한 부모를 만났다면 세상의 모든 자폐 아동의 부모 중 딱 한 명을 만난 것이다.’

자폐 아동의 부모들은 본인이 처한 상황과 본인이 아는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서 모두 천차만별로 다르게 자폐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아동을 받아들이고 대한다. 자폐 아동들이 각자 고유한 개별적인 존재들이니 이들을 키우고 교육시키고 지원하는 방법들은 모두 다르겠지만, 현재의 과학적/의학적 관점에서 명확한 진실은 자폐를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기름을 걷어내 듯 아이와 분리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비자폐인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 방식이 비자폐인의 뇌가 관장하는 일이라면, 자폐인 내 아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입고 자고 먹고 놀고 친구와 사귀는 모든 일련의 행동, 즉 존재 방식 자체는 모두 자폐인의 뇌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들의 소아과 전문의 캐서린은 진단 초기에 이렇게 말했다.

“자폐인의 뇌는 맥 운영 시스템이고(Mac OS), 비자폐인의 뇌는 윈도우 운영 시스템(Windows OS)이라고 생각하면 쉬워요. 둘은 그냥 다른 거예요.”

자폐란 무엇인가? 자폐인으로 사는 일과 자폐 아동의 엄마로 사는 일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과 성찰에 앞서 “장애”나 “자폐”란 용어에 압도 당했을 때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이 위태로운 순간에 자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재한 상태에서 ‘희망’만을 말하면 십중팔구 패착에 빠지기 쉽다. 왜냐면 희망의 기준과 근거가 ‘비자폐인이 되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자폐인은 정상, 자폐인은 비정상’이란 이분법으로 아이를 바라보면 아이의 모든 모습이 불만족 스럽다. 자폐 아동들이 음식에 대해 갖는 특정한 선호, 자폐 아동들이 호소하는 수면의 어려움, 자폐 아동들이 지닌 상동행동, 자폐 아동들이 지닌 특정한 흥미 위주의 열정적인 대화법, 자폐 아동들이 지닌 감각의 다름에서 오는 예민함, 자폐 아동들이 지닌 의사소통 방법의 다름 등,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뜯어고치거나 치료하거나 제거하고자 하는 다급함이 생기기 쉽다.

마음이 급하고 앞서다 보면 실수가 누적되고 후회가 쌓인다는 것을 나의 경험과 앞서간 동료들의 경험과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내 주변의 자폐 성인 당사자들의 증언들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부모의 사랑을 가장한 수많은 ‘치료’라는 이름의 ‘학대’와 ‘내 아이가 자폐인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모의 탄식과 소망들은 정신적인 손상을 초래하고 스스로를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다고.

“엄마가 모래를 밟으라고 하니까 싫었어.”

가끔 과거의 특정한 상황들을 강렬하고 정확한 이미지로 기억해내서 놀라게 만드는 아들은 3살 때 사진을 보더니 이제서야 진심을 말한다. 자폐인들이 ‘감각의 다름이나 예민함(Sensory differences/issues)’으로 일상에 제약이나 불편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던 시절이라서 바닷가에서 여러 번 실랑이를 하곤 했었다.

“무지는 대가를 치른다.”

통각이 심한 벤이 맨발로 모래를 밟는 일과 모래가 계속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때였으니 벤의 욕구가 존중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엄마도 세 살짜리 앞에서 처절한 패배를 맛보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자폐인의 특별한 욕구는 ‘취향과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 임을 알지 못하던 때였으니 모두가 불행 속에서 허우적댔다.

생각해 보면 모든 노력과 마음을 다해 후회 한 줌 없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후회스럽고 미안한 일들이 많다. 벤에게 제공한 거의 모든 육아 방법과 환경들은 비자폐인 아동들을 기준으로 한 그들에게 적용 가능하고 어울리는 것들 투성이었으니, 나의 전심은 오히려 아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때늦은 깨달음과 후회, 그래서 솔직한 편을 택하기로 했다.

“미안해. 엄마가 잘 몰라서 너를 힘들게 했어. 엄마에게도 자폐는 처음이라서…”

아직 자녀의 자폐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혼란스러운 지인은 달콤하고 순한 말들이 그립겠지만, 처음 자폐계에 입문하는 후배들에게 차라리 단호하게 말하는 편을 택한다.

“자폐인은 요람부터 무덤까지 자폐인이야.”

자폐인은 태어날 때부터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폐인이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뇌가 비자폐인들과는 다르게 연결된 이들은 자폐인의 고유한 방식과 속도에 맞춰 성장과 발달을 하여 자폐 성인이 되는 것이지, 자폐 아동이 좋은 치료를 많이 받아서 치유되고 고쳐져서 비자폐 성인이 되지 않는다.

“엄마가 나처럼 뇌가 다르게 작동하는 사람들을 뉴로 다이버전트(Neuro Divergent) 라고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너무 이상하지 않아? 내 입장에서 보면 비자폐인들이 다르게 보이는데.”

한날 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지듯 반문했다. 한 여름의 햇살처럼 눈부시고 한 밤의 별들처럼 반짝인다. 판단 기준이 상대적인 것임을, 누구의 관점(perspective)에서 읽어 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읽힌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진단의 특권(A privilege of diagnosis)’을 온전히 거머 쥔 아동과 엄마가 누리는 기쁨같은 것이다. 자폐인의 한계와 강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자폐인으로서 자존감을 갖고 살라고, 비자폐인을 동경하며 흉내 내고 따라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자폐인의 진정하고(authentic) 고유한(genuine) 관점과 시각으로 세상을 읽어내라고, 자폐인의 언어와 목소리로 말하라고, 그리고 너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바꾸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저항하라고 건네 준 무기다. 벤은 이미 엄마의 기대 이상으로 훌쩍 성장했다.

“우리 아이들은 자부심 그 이상이야!”

6월 18일은 세계적으로 ‘자폐인 자부심의 날(Autistic Pride Day)’이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뉴로 다이버전트인 호주 로컬 친구 엘리가 문자를 보내왔다. 엘리의 초등학생 자폐인 두 아들 루이와 노아가 수업 중에 자발적으로 자폐인이란 사실을 공개하고, 왜 자폐인으로 사는 일이 자랑스러운가에 대해 발표하고, 교사와 학급 친구들과 함께 자폐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사도 부모도 전문가도 아닌 당사자인 아이가 본인의 언어와 목소리로 들려줬다는 사실이다.

호주엔 제2, 제 3의 루이와 노아가 점점 늘어난다. 내년엔 벤이 학급에서 본인의 정체성과 자폐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공개할 수 있기를 살짝 기대 해본다. 내 주위엔 성인 진단이 늘면서 가족력이 강한 자폐를 가족의 2세대, 3세대 간으로 공유한 가족들이 동료 자폐인들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한다. 자폐계에 만연한 ‘부정과 혐오의 낙인’을 ‘다양성의 공존과 다양성의 강점’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 자폐의 서사를 다시 써내려 가고 있다.

6월 18일을 기념하기 위해 호주의 자폐인 자조와 권익옹호 단체인 '리프레이밍 오티즘(Reframing Autism)'에서는 (자폐인의 자부심)이란 책을 발간했다. “무엇이 자폐인 당신을 자랑스럽게 만드나요?” 란 질문에 아동부터 성인에 이르는 호주 자폐 당사자들의 대답을 엮은 책을 아들과 읽으며 올해 처음으로 ‘자폐인 자부심의 날’을 축하했다. 책 말미에는 내가 벤 덕분에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 벤이 이루는 성취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는 점, 그리고 벤의 엄마로 사는 일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말해줬다. 그나저나 엘리의 말처럼 정말로 궁금하다.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자라난 자폐 아동들이 사는 미래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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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나 칼럼니스트 아이 덕분에 통합교육, 특수교육, 발달, 장애, 다름, 비정형인(Neuro Diversity), ADHD, 자폐성 장애(ASD)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되어버린 엄마.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아이가 발달이 달라 보여서 바로 호주로 넘어왔습니다. “정보는 나의 힘!” 호주 학교의 특수·통합교육의 속살이 궁금해서 학교 잠입을 노리던 중, 호주 정부가 보조교사 자격증(한국의 특수 실무사) 과정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냉큼 기회를 잡아 각종 정보를 발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일반 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호주의 교육(통합/특수)을 바라보고, 아이를 지원하는 호주의 국가장애보험 제도(NDIS) 등에 대해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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