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 스틸컷. ⓒ네이버영화

날마다 수상한 소식들로 술렁거리는 인간세상이 시끄러워도 찬란한 봄은 왔다. 화사한 꽃들에게 질세라 나무들도 온 몸으로 진한 연두빛을 뿜어 올리고 있다.

봄 산은 어느 계절의 산보다 예쁘다. 뾰족한 잎새는 아기의 속살처럼 부드러우면서 강한 생명력으로 단단한 나무가지를 뚫고 돋았다.

사람들의 삶에도 봄의 산 같은 때가 있다. 세상의 잣대로 재는 성공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는 그때에는 자기 자신의 열정만으로 충만한 시간이다.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고 마구 예쁠 때, 그건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하여 도전하는 때 인 거 같다.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는 피아니스트 유시앙의 성장이야기를 다뤘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의 감동이 연두빛으로 잔잔하게 스며 있다.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 스틸컷. ⓒ네이버영화

유시앙은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다. 병원에선 조산이라는 것외엔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아기에서 아이로 자라며 어둠 속구석진 방에서 아이는 늘 무언가를 두드렸다. 소리는 아이가 표현하는 마음이었다.

엄마는 피아노 앞에 앉혔고, 아이는 피아노를 기막히게 잘 쳤다.

음악을 이해하는 감성이 가르침보다 앞서 성장했다. 시각장애인 아이가 연주하는 피아노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으로 휘감았다.

자연스럽게 진로를 음악대학으로 정했지만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대학교 측에선 수업 받으러 이동할 때 당번을 정해서 도와주라는 지침이 있었지만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드러냈다.

급기야는 점자 블록대로 걸으면 된다며 유시앙을 혼자 두고 가버렸다.

유시앙은 길을 익혀 혼자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습은 엄마와 함께 했다.

계단을 내려가 열걸음 정도 가서 네 그루의 나무를 지나고, 길 끝에서 우측으로 돌아 다시 여덟개의 기둥을 지나 복도 끝에 있는 실습실까지. 수십번 부딪치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나 길을 외웠다.

합주 연습시간에는 유시앙의 피아노가 끼어들 시간을 주지 않는다.

유시앙에겐 잊혀지지 않는 상처가 있었다. 초등학생 때 모든 콩쿠르에서 우승을 휩쓸 당시 한 어린 경쟁자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네가 맹인이기 때문에 점수를 더 받은거야."

유시앙은 이후에 누군가를 이겨야하는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을 따돌리는 분위기는 그때의 아픔을 떠 올리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시앙을 배척하던 냉랭한 기운은 담당 교수의 휴직으로 대신 강의를 하게 된 강사가 낸 시험으로 반전을 맞았다.

박자를 맞추는 쪽지 시험에서 정확히 모든 음을 기억하는 유시앙의 실력을 같은 과의 학생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점차 유시앙에게 말을 건네고 화음을 맞춰주었다. 농담을 하고 유시앙 기숙사에 몰려와 스포츠 중계를 함께 들었다.

그는 또 맹인학교에서 방과후에 아이들 합창을 가르쳤다.

어느 날, 다니던 길이 공사 중이라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다. 지팡이에 의지한 낯선 길은 용기만으론 역시 위험했다.

횡단보도가 끝나는 곳에서 길가 턱에 걸려 난감해하고 있을때, 손을 내민 건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치애였다.

치애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지쳐 좀 우울한 아가씨다. 야간경비로 일하며 낮에는 늘 취해 있는 아빠와 쇼핑중독인 엄마의 카드빚을 갚느라 허덕이며 산다.

맹인학교 아이들은 유시앙을 무척 반겼다. 피아노 앞에 동그랗게 서서 손바닥을 피아노 몸체에 대고, 한 손에는 작은 악기 하나씩 가지고 있다. 피아노의 선율을 손끝으로 느끼는 중이다.

"보통 음악을 연주할 땐 지휘자의 지휘를 보며 박자를 맞추지만, 우린 지휘자를 볼 수 없으니까 서로의 호흡을 듣고, 서로를 느끼면서 노래를 맞춰 불러야 해."

아이들이 노래 연습을 마치고 돌아간 빈 교실에서 유시앙은 치애만을 위한 연주를 했다.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 스틸컷. ⓒ네이버영화

치애는 그렇게 아름다운 연주는 처음 들은 것 같았다. 눈을 감고 피아노에 손을 대고 파동을 느꼈다.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시간이었다.

유시앙은 혼잣말처럼 나직히 말했다.

"난 뭐든 해보고 싶어요. 뭘 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무얼 좋아하냐는 질문에 치애가 답한다. 가슴 속에 처박아 두었던 생각이다. 왠지 자신을 볼 수 없는 유시앙 앞에서는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춤을 출 때면 심장이 세차게 뛰었어요. 그 순간에는 내가 진짜 살아있다고 느꼈어요."

유시앙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치애는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둘은 그날 처음 만났지만 오래된 친구 같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두 사람은 친구일지 모른다.

무언가를 이루는 성취는 내일이어도 모레이어도 괜찮다. 오늘은 다만 오늘 할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할 뿐이다.

유시앙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잘 할 수 있는 일에 정성들여 마음을 기울였다.

빛이 없는 세상에서 빛의 세상을 향해 두드리는 아름다운 소통의 소리다.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의 주연 유시앙역은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니스트 황유상이 맡았다. 시각장애인 연기, 피아노 연주를 따로 꾸며 연기할 필요가 없는 이유였다.

그의 피아노 소리는 보드라운 잎새를 간지르는 바람처럼, 향기를 머금고 흩날리는 꽃잎처럼 아름답다.

아침 이슬이 풀잎에 떨어지는 소리처럼, 종달새의 경쾌한 노래처럼 세상과 피아노로 이야기한다.

그 소리는 수줍고 조심스럽지만 밝고 당당하다. 빛을 볼 수 없지만 마음은 빛보다 밝은 그가 세상에 들려주는 아름답고 따뜻한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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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칼럼니스트 별빛영화관에서는 좀 다르게 사는 사람들,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 우리가 몰랐던 영화 일때도 있고, 이름을 떨쳤지만 비장애인의 눈으로 읽혔던 영화들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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