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보는 영미. ⓒ최선영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폰이 울린다.

영미의 심장이 쿵-쿵-요동친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정우의 소리였다. 다른 벨 소리와 달리 정우를 알리는 소리는 요란했다. 어디서든 그의 전화는 놓치지 않고 받고 싶은 영미의 마음이었다.

"여... 보세요...“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정우의 전화를 받았다.

"나... 정..."

"알아, 정우."

"으... 응, 잘 지내지?"

영미는 그렇게 정우와 다시 만났다.

4년 전 한 학기를 남겨놓고 정우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오겠다며 입대했다.

이야기 나누는 정우와 영미. ⓒ최선영

"나 없다고 한눈팔지 말고~"

"한눈팔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졸업하면 바로 오픈인데... 아마 잠잘 시간도 없을 거야."

영미는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혜선, 지민과 웨딩숍을 준비 중이었다.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그래서 고민 끝에 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저축해둔 돈과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이들은 일찌감치 사업을 준비했다.

정우도 제대하고 바로 합류할 생각이다. 메이크업 전공 영미, 헤어 전공 지민, 디자인 전공 혜선, 사진 전공 정우~

넷이서 함께 하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우는 제대하고 마지막 학기를 끝내고 영미에게 프로포즈 할 생각이었다.

"시작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해. 힘들겠지만 잘 하고 있어~ 영준이가 많이 도와줄 거야."

"걱정 말고 나라나 잘 지켜~호호."

정우를 보내고 잠잘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오픈하고 자리를 잡아갈 즈음 걸려온 정우의 전화.

그날도 정우를 알리는 벨은 요란하게 울렸다.

"어? 깜짝 휴가라도 나온 건가?"

"여보세요."

"누나...“

영준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영미는 어떻게 병원까지 달려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고 소식을 받아든 심장은 얼음처럼 굳어버렸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군대에서 간혹 사고가 일어난다는 건 뉴스로 접했지만, 그 일을 현실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침대에 누워있는 정우를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영미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야기하는 정우와 영미. ⓒ최선영

1년이란 시간은 그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충분했나 보다. 정우도 영미도 하반신마비, 지체장애라는 현실을 어느 순간부터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우리 그만 만나자."

덤덤해지기 위해 더 많이 웃는 영미에게 툭 던진 정우의 말.

"왜?"

"알잖아. 1년 동안 같이 있어봤잖아."

"아는데, 같이 있어봤는데.. 뭐?"

영미는 정우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정우는 단단히 결심한 듯 영미를 힘들게 했다.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

영미를 힘들게 한 건 정우만이 아니다 영미 부모님도 안타깝지만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영미의 마음을 쪼그라들게 했다. 그리고 또 8개월이 흘렀다. 지쳐버린 영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우에게 전화하는 것도, 찾아가는 것도.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잊어버린 줄로 착각할 때도 있었다. 최정우라는 이름조차도 드라마 주인공 이름처럼 막연하게 느껴졌다.

정우와 다시 만나고 영미는 알았다. 잊기 위해, 아프니까 힘드니까 잊고 싶어서 심장이 굳어진 채로 살았다.

심장이 뜨거워지지 못하도록 얼음물을 마셔가며, 심장이 정우로 인해 뛰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가며.

정우의 전화를 받고 알았다.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정우는 달라졌다. 현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절망하며 자포자기하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환한 미소를 안고 돌아왔다.

"그때는 미안했어."

"아냐,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아."

"너만 괜찮다면 우리 친구로 지내는 건 어때?"

"친구?"

"응... 너를 못 보고 사는 것보단 친구라도 되고 싶어서."

"친구 말고 애인은 어때? 우리 원래 친구 아니었잖아.“

영미와 정우는 그렇게 예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렸다. 정우가 휠체어를 타는 것 말고는.

하재헌 선수. ⓒ최선영

"너랑 그렇게 헤어지고 나 죽고 싶었어. 그런데... 죽을 수는 없었어. 자식이 두 다리를 잃은 건 참아낼 수 있는데 자식이 죽는 건 못 보겠다는 엄마 말씀이 나를 붙들었어."

"죽기는 왜 죽어. 살아만 있으면 시간이 세월이 힘든 무게를 데려가잖아..."

"응...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진을 다시 찍기 시작했어. 두 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 가서 내가 담고 싶은 것을 담아오는 것도 감사한 일이란 걸 많이 느껴. 휠체어를 타고 사진을 찍는다는 게 쉽지 않아서 포기할까... 생각하던 중에 하재헌 선수가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금메달 따는 뉴스를 봤어. 장애인들은 다 나름의 사연이 있지만 내가 관심을 가진 건 나처럼 군에서 다쳤다는 점이었어.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고 1년 동안 21차례의 수술을 받고 퇴원 후 만나게 된 조정의 매력에 빠져 선수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행복해진다는 것을 느꼈어. 사진 찍는 게 조정보단 쉽잖아. 근데 난 조금 힘들다고 포기해버릴 생각을 했어.

그리고 너 생각이 나더라. 좋아하는데... 그냥 포기해버린 나 자신이 바보 같아서.

널 진정 위하는 길이라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내가 초라하고 비참해지기 싫어서 핑계를 한 것인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어.

하재헌 선수가 장애인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고 내년 도쿄 패럴림픽 출전을 목표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처럼, 나도 휠체어 사진작가로 내 인생을 멋지게 만들어갈 거야. 영미 네가 있어서 내 꿈이 더 빛날 것 같아."

"장애인이 되는 이유는 다 다르겠지. 하지만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현실에서 만난 어려움을 이겨내고 꿈을 향해 달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서 있을 때보단 키높이가 낮아졌지? 서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 낮은 자리에서 더 많이 보고 그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았으면 좋겠어. 하재헌 선수가 너에게 용기를 준 것처럼 너도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면 좋겠어."

다정한 정우와 영미. ⓒ최선영

정우와 영미의 미소와 함께 붉은 노을이 반짝거린다. 하늘 높이 있을 때보다 낮은 자리에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저 태양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빛나는 저 태양처럼 용기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금메달을 딴 하재헌 선수처럼.

깊어지는 가을만큼이나 정우와 영미의 사랑도 깊어지고 꿈도 커지기를. 우리 모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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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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