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심원들' 포스터. ⓒ이옥제

며칠 전,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시작됐던 일정이 한 시간 정도 일찍 끝난 날이었다. 애당초 일정이 본래의 시간대로 마쳐진 후에도 다음 저녁 일정까지는 제법 여유 시간이 예상됐던 터인지라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예상외로 주어진 세 시간 가량의 공백에 난감함도 잠시, 근처에 위치한 영화관 건물이 번뜩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곤 ‘시간만 잘 맞으면 영화 한 편 보고 움직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입장한 영화관. 상영되고 있는 영화의 시간대를 찬찬히 살펴보노라니, 마침 상영이 종료된 후에도 다음 일정에 이동할 시간까지 충분히 주어질 법한 영화 한 편이 보인다.

바로, 지난 5월 16일 개봉한 배우 문소리 주연의 영화 배심원들.

어린 시절 입은 화상으로 인해 양손의 절단장애와 안면장애를 가진 중년 남성, 이 중년 남성에게는 노모(老母)와 여고생인 딸이 있다. 이미 백발이 성성한 것은 물론, 허리가 굽을대로 굽었지만 신체적인 장애로 인해 변변한 직업이 없는 아들, 그리고 손녀딸을 위해 식당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온 노모는 급기야 극심한 요통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러 간 주민센터에서는 영구적 장애가 아닌 통증으로 인한 일시적 노동의 상실은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말뿐. 반복적인 분노로 표출한 절박함에도 동일하게 돌아오는 결과에 결국 가정이 파탄 나고, 순식간에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가 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는 2008년 첫 시행된 국민참여재판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영화가 클라이막스로 치닫을수록 돋아나는 소름과 함께 솟구치는 눈물을 애써 추스르며 두 시간 가량의 영화를 마무리한 후,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여러 일정 중의 공백을 일부러 보는 영화로까지 채워가며 도착한 이 날의 마지막 저녁 일정의 도착지는 서대문구청에서 진행하는 주민인권학교.

현직 인권강사이긴 하지만 늘 배움의 자세로, 강의를 하는 것뿐 아니라 어디선가 인권강의가 열린다고 하면 우선적으로 가보려는 짝꿍강사와의 의기투합의 결과물인 것이다.

‘인권과 비밀의 방’이라는 주제로 시작된 이 날의 강의. 저녁 7시라는 시간대와 더불어 조근조근한 강사님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강의가 진행되는 두 시간 동안 지루함은커녕 내용이 깊어질수록 가슴 속 한 켠에 뭉클한 무언가가 반복적으로 올라왔던 것은, 우연찮게도 강의의 내용 전반이 앞서 본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서였을까?

처음 인권을 공부하던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벌써 몇 사람에게, 몇 번씩이나 들었던 말이지만

세계인권선언문 1조. “모든 사람은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동등하게 태어났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동료애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조근조근한 강사님의 목소리를 통해 읊어지는 단어와 문장들이 권리의 주체자는 국민, 의무의 이행자는 국가라는 말로 바뀌어 더욱 꼭꼭 씹어져 마음에 들어온다.

나치시대의 고위공직자였던 아돌프아이히만. 전범자로 체포되었을 때 그는 당당했다고 한다. 자신은 국가와 정부가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해 국민의 세금을 아끼기 위해서 일했을 뿐이며,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처형하거나 구속한 적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정치철학자 안나 하렌트는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은 것’이 유죄라고 주장한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은 곧 ‘행동의 무능을 낳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두 사람의 말을 우리나라의 현실, 현 상황적 여러 제도들에 비추어보니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바로 긴급 생계비 지원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부의 긴급 생계비 지원제도는 최소의 기본권 생활을 하고 있는 국민들이 더 이상의 기본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제도인 줄 알고 있었던 나.

하지만 월세 단칸방의 임차 보증금 몇 백 만원 때문에, 통장에 있는 단 몇 백의 만원의 비자금 때문에 지원 대상이 되지 못해 질병의 고통 앞에서 병원조차 포기한 채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한다.

만들어진 제도나 매뉴얼 가운데, 더욱 제대로, 더욱 깊이 생각할 힘과 말할 힘, 행동할 힘을 갖추고 주어진 일에 임할 수 있는 공직자들과 국민들이 많아지기를 말이다.

“한 국가의 인권수준은 어떤 평균적인 중심이 아닌 가장 약한 곳에서 표본을 추출한다.”는 이 날의 강연자 양정훈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깊이 동감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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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제 칼럼리스트
현재 장애인권강사 및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인증 직장 내 장애인식개선 교육강사로서 초/중/고등학교를 비롯한 종사자 교육, 장애인 당사자교육 등. 다양한 교육현장을 찾아 활발한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평범한 주부의 삶에서 장애인권강사라는 직함을 갖게 된 입문기는 물론, 그저 평범한 삶을 위해 ‘치열함’을 나타내야 하는 우리네 현실 속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장애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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