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친구가 되어가는 영화 '그린북'포스터 ⓒ이옥제

몇 주 전, 에이블뉴스의 지면 속 기사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날이었다. 여러 정보와 소식들이 들어찬 지면의 정독(精讀)릴레이를 이어가던 중, 유난히 오래도록 나의 눈길이 머물렀던 것은 차미경 칼럼니스트의 칼럼 한 편이었다.

「우리 안의 그린북」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글에는 지난 1월 개봉한 영화 ‘그린북’에 대한 간략한 줄거리와 더불어 과거와 현재의 사회적 통념과 현상, 그리고 그에 대한 본인의 소고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압축해 놓은 한 편의 글을 보니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개봉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었기에 거의 대부분의 영화관에서는 상영이 종료되어 있었고, 결국 추후 VOD의 구매를 기약하던 중, 집근처 소극장에서 막바지로 상영되고 있던 영화 시간표를 발견하곤 지난 주, 짝꿍강사와 함께 영화가 상영되는 서울 노원의 ‘더 숲 아트시네마’로 향했다.

다시 한 번 간략히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 하자면, 1960년대 미국 남부지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당시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 그 중에서도 남부지역은 흑인들에게 상당히 위험한 곳이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부득이(?)이러한 지역을 여행하는 흑인들에게 안전한 숙박 및 편의시설들의 정보를 담은 가이드북이 제작되었는데 이 가이드북의 저자는 흑인 우체부 ‘빅토르 휴고 그린’.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그린북이다.

주인공 중 한 명인 토니는 지식과 상식은커녕, 주먹과 허세로만 똘똘 뭉쳐진 백인 남성의 클럽종업원이다. 역시 이 주먹과 허세가 부른 화로 인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그는 우연한 기회로 미국 남부지역으로 순회공연을 가는 흑인 피아니스트 돈셜리 박사의 운전자로 몇 개월간의 고용계약이 된다.

평소 흑인에 대한 편견이 있던 토니. 하지만 당장 돈이 필요했기에 단순히 운전만 하고 돈을 받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돈셜리박사의 피아노 연주 솜씨나 인품을 인정하게 되고, 그로인해 순회공연 중 맞딱뜨리게 되는 인종차별, 그리고 여러 불합리한 일들에 함께 맞서고 대항하게 된다.

결국 처음의 계획과는 다르게 매니저 겸 보디가드, 그리고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영화의 말미, 지난 2013년, 서로가 몇 개월 차이를 두고 사망할 때까지 50년의 시간동안 지속된 우정을 기록한 메이킹영상이 덧붙여진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인종 영화가 대부분 그러하듯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인종차별 영화가 이렇게 또 다시 한 편의 글이 되도록 내 마음에 오래 남은 이유는, 영화의 상영 중간중간, 비춰지는 장면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옆에 있는 짝꿍강사와의 만남이 자연히 떠오르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인 나와 장애인인 짝꿍강사가 협업으로 진행하는 장애인권교육 장면 ⓒ이옥제

뇌병변이라는 신체적인 장애 외에 공황장애와 불안장애를 함께 동반하여 스스로 외부와의 끈을 단절시키려던 그의 심성과 글재주가 너무 아까워 할 수 있다고, 내가 손잡아 줄 테니 함께 세상으로 나가보자고 그의 손을 잡았던 4년 전. 그리고 그러한 나의 진심이 통했던 걸까?

지금은 어느덧 출간을 한 작가로 데뷔한 그는, 어느 날 내게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를 만들어갈 더 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통합과 존중의 가치를 전해주는 인권강사의 길을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리고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 이제는 어엿이 동료강사가 되어 함께 일하고 함께 고민하는 오늘까지.

이 모든 시간이 더해진 에피소드들이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몇 번이고 찔끔찔끔 새어 나왔던 눈물의 이유를 대신 전해줄 수 있으리라.

흑인이라는 이유로 허름한 호텔에, 백인이라는 이유로 좋은 호텔에 나뉘어 숙박하는 영화 속 장면에서 편견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 계단과 턱들이 가로막는 우리네 장애인들의 현실이 보였고, 돈셜리 박사를 따라 흑인들이 주로 출입하는 클럽에 들어서며 쭈뼛대는 토니의 모습에서 지난 날의 내 모습이 보였다.

장애인인 그에게 비장애인인 내가 함께 있음으로 인해 그의 자립심을 떨어트린다는 비난은 물론,

“활동보조인이세요?”

지금도 교육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이 한마디에 장애인권교육은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 당사자가 해야 할 것 같다며 그만 두기를 고민하던 내게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 누구만을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은 이 사회에서 진정한 통합과 진짜 인권존중을 만드는 일은 그 시작이 되는 인권교육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며 시너지가 발휘되는 ‘협업교육’이 진행 되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며 나를 설득하기를 반복하던 짝꿍강사.

그러한 고집 덕분일까. 언제부터인지 협업의 가치를 인정하는 반경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하고, 잦은 협업교육 의뢰가 요청되는 것을 보며 생각한다.

토니와 돈셜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던 것처럼 여전히 열을 올리며 주장하는 우리의 협업교육이 결코 헛되지는 않을 거라고.

오늘날 이 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목소리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 모두의 몸부림들이 결코 헛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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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제 칼럼리스트
현재 장애인권강사 및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인증 직장 내 장애인식개선 교육강사로서 초/중/고등학교를 비롯한 종사자 교육, 장애인 당사자교육 등. 다양한 교육현장을 찾아 활발한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평범한 주부의 삶에서 장애인권강사라는 직함을 갖게 된 입문기는 물론, 그저 평범한 삶을 위해 ‘치열함’을 나타내야 하는 우리네 현실 속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장애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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