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잠긴 그녀 ⓒ최선영

그녀 이야기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그를 만났다.

노래 가사처럼 첫눈처럼 나에게 온 그는 나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어둠뿐이던 세상에 들어온 그는 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눈물 한 조각까지 닦아주었다.

“눈이 오네...”

창 너머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식어가는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커피를 좋아하던 그는 과거 속의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 어디엔가 살아있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늘 이렇게 커피가 식을 때까지 손에서 잔을 놓지 못한다.

마치 커피를 좋아하던 그를 놓아버리는 것 같아서...

문이 열리고 하얀 눈을 가득 안고 들어온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지난 사랑을 잊지 못한 체 그랬다.

“저... 아이들 간식으로 뭐가 좋을까요?”

이렇게 예쁜 첫눈이 내리는데 이 사람은 강아지 간식을 사러 왔다.

“유기농 고구마도 좋아요.”

“알아서 몇 가지 챙겨서 주세요.”

그는 간식 고르는 걸 내게 맡기고 장난감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장난감을 몇 개 들고 와서 함께 포장해달라고 했다.

“선물하실 건가 봐요.~”

“네... 오늘이 그 녀석 떠난 날이라..”

“아...”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그의 눈빛에서 소중한 아이를 먼 곳으로 보낸 아픔이 보였기 때문이다.

책상에 놓여있던 내가 만든 조화를 건넸다.

“제 마음도 전해주세요.”

꽃을 받아드는 그의 손이 고맙다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가 다시 내 세상으로 들어왔다.

“저... 아이를 하나 키우고 싶어서요.”

예쁘고 건강한 아이를 보여주었다. 3년 전에 몰티즈를 키워봤다는 말에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잘 알 것 같아서.

그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그녀 ⓒ최선영

그날 이후 나는 그를 자주 보게 되었다. 마주 앉아 함께 커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 사이에 있던 어색함도 어느 날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그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도 그 아이도 내 곁을 떠났어요. 저는 한쪽 다리를 잃었고요...”

교외로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사고가 났고 그 사고로 연인과 함께 키우던 강아지를 잃었다. 그의 한쪽 다리와 함께.

그리고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났다. 한순간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랑은 그런 건가 봐요... 변할 수 있는 그런...”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사랑 아닐까요?... 잘은 모르지만...”

“변할 수 있는지 변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지 우리 한 번 해볼래요?”

그가 한쪽 다리가 없는 장애인인 것은 그가 말하지 않을 때는 몰랐다. 그냥 살짝 불편한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가 한쪽 다리가 없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 지우지 못한 과거의 그가 여전히 존재하는데 다른 사람과 또 다른 감정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저... 좋아했던 사람 있어요...”

“좋아했던 사람?... 저도 사랑했던 사람 있어요. 말했잖아요.”

“그게... 전 아직 그 사람을 잊지 못한 것 같아요.”

“저도 혜원 씨 만나기 전까지는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랑했던 사람을 잊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았던 그 사람과의 시간은 추억으로 간직하세요. 저도 그럴게요. 그 기억을 지우자는 게 아니라 우리 둘만의 또 다른 추억을 만들자는 거예요. 전 제가 좋아했던 그 사람도 소중했지만 사실 함께 키우자고 분양받았던 강아지를 더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내가 안고 살아갈 장애가 싫어서 떠났지만 그 아이는... 내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평생 다른 아이를 키울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혜원 씨를 보며그 아이를 기억하면서 다른 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아이에게 해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해주고 싶어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 안에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떠난 그는 내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니까... 그에 대한 배신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같은 게 밀려왔다. 그래서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 달이 흘렀다. 그는 한 번도 오지 않았고 어쩌면 그가 깊은 생각 없이 던진 제안일 수도 있을 거라는 마음이 들어 서운하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다시 눈이 내렸다. 첫눈처럼 함박눈은 아니었지만 세상을 예쁘게 만들 만큼 고운 눈이 내렸다. 그가 또 내 세상으로 들어왔다. 몸이 축 처진 아이를 안고.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이렇게 기운 없이 이러네요”

“병원으로 가셔야지...”

나는 그와 함께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갔다. 어린 것이 아파서 축 늘어진 것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반가웠다. 아니 고마웠다. 하필 그때 기특하게 아파준 것이.

그리고 나는 우리 사이에 다리가 되어 준 설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 첫눈 같은 사람이다. 나는 이제 식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첫눈처럼 내게 온 그와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그와 함께 하는 하얀 계절이 행복하다.

생각에 잠긴 그 ⓒ최선영

그의 이야기

복학을 하고 나는 그녀를 만났다. 졸업을 함께 하고 어렵다는 취업의 큰 문을 나란히 통과했다. 3년만 연애하고 결혼하자는 말에 그녀는 대답 대신 강아지를 함께 키우자고 했다. 내 말에 대한 대답이라는 생각에 나도 좋다고 했다. 함께 강아지를 분양받고 키웠다. 내 자취방에서.

쪼그마한 녀석이 먹성도 좋아서 물에 불리지 않아도 사료를 어찌나 잘 먹는지 하루하루 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휴일 아침 예방접종 끝난 기념으로 난생처음 산책을 시켜주려고 차를 몰고 공원으로 가고 있었다. 한적한 도로에서 만난 난폭운전자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난 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 사고로 재롱을 부리며 꼬리를 살랑거리던 아이의 몸은 싸늘해졌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보니 한쪽 다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 어떤 단어로도 내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이 내 마음을 아프게 찢어놓았다. 내 잘못으로 쫑아를 잃은 것 같아 그녀에게 미안했다. 내가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가자는 길을 갔더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왜 그날 굳이 그곳으로 가려고 했을까..

내게서 돌아서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쫑아를 죽게 한 내가, 장애인이 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말없이 보내주는 것 외에는.

그리고 3년이 흘렀다. 그녀 때문에 쫑아를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를 많이 좋아했나 보다. 나를 떠난 그녀보다 쪼그마한 그 녀석이 더 보고 싶은 것을 보면.

쫑아가 떠난 날이 또 찾아왔다. 나는 매년 이날이 되면 쫑아에게 한 번도 사주지 못했던 간식을 고르고 장난감을 산다. 그리고 쫑아를 생각하며 형님이 키우는 아이들에게 가져다준다. 그날도 나는 쫑아를 생각하며 그곳을 들렀다. 쫑아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눈이 내리는 날에.

그해에 만난 첫눈이었다.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는 노래가 애견숍을 들어서자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익숙한 곳에 낯선 그녀가 있었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조금 둘러보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전체적인 것은 변하지 안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아기자기 한 인테리어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쫑아를 위해 간식을 고르고 장난감을 샀다. 꼬리를 흔들며 폴짝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내 마음까지 차고 들어왔다. 귀여운 그 아이들의 모습이 집에 와서도 눈에 어른거렸다. 커피를 내주던 그녀의 모습도.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절대로 쫑아 같은 아이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후 형님 집에서 저녁을 먹다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형수님 후배라는 사실과 형수님 소개로 그 애견숍을 인수하게 된 그녀 역시 이별의 아픔 때문에 늘 마음 한 편이 멍든 것처럼 저리다는 것을.

그녀에게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들... 내게 시작된 그 마음을 알기 위해 다시 그곳을 찾았다. 상냥한 미소 뒤에 보이는 슬픈 그림자... 내 마음에도 있는 그것을 그녀도 늘 안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와 마주하는 그 ⓒ최선영

쫑아에 대한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로운 아이를 만나고 싶었다. 이제는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라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하고 싶었다.

어렵게 고백했는데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가 장애인이어서 싫은 건가요?”

“절대 아니에요. 만약 그런 마음이라면 얘기했겠죠. 저... 좋아했던 사람 있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말해주었다. 5년 전 군 복무 중 사고로 그녀 곁을 떠난 그 사람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그녀를 보며 확신이 들었다. 이런 여자라면 끝까지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아니 사랑해주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한 달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그 한 달 동안 그녀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매일 커피를 마시며 함께 했던 시간들 속에 어느새 이렇게 내 마음을 그녀로 가득 채우고 있었나 보다.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누르며 다시 그녀를 만날 날을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고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눈이 내렸다.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는 노래를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듣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첫눈처럼 그녀에게 가고 싶었다. 내가 그녀에게 첫눈이 되고 싶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도 머뭇거려서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가려고 일어서는 순간 설이가 기운 없이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아, 왜 그래? 응?”

너무 두려웠다. 설이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설이를 데리고 그녀에게 갔다. 그녀와 함께 병원을 가서 걱정할 만큼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이 되었다. 순간 설이가 기특했다. 그날 설이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면 우리의 만남이 얼마나 어색했을지...

설이와 행복하게 웃는 그녀와 그 ⓒ최선영

그녀와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하얀 계절이 좋다. 그날처럼 눈이 오기를 기다리며 설이와 함께 우리는 매일매일 또 다른 행복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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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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