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 ⓒ최선영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추석을 하루 앞둔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집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소리, 주인집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문으로 나가 막 도착한 가족들을 반기는 소리,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나누는 따뜻한 말들이, 문틈 사이로 가득 들어왔습니다.

“서진아-”

주인 할아버지께서 그를 불렀습니다.

“네-”

그는 마당으로 달려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유 서진입니다.”

이번에 새로 이사 온 학생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가족들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넵니다.

“반가워요. 있다 같이 식사해요.”

“아... 괜찮은데..”

“같이 해요. 괜찮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서 다시 책상에 앉았습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조용하던 집에 생기를 주었고, 그의 마음도 들떠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웃는 아이들의 얼굴 너머로 그녀의 미소가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창을 통해,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방긋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 ⓒ최선영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제 리듬을 타고 움직이던 심장이 일시 정시된 듯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얼굴까지 화끈거리게 했습니다.

아이들을 보던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너머 오자 그는 그만 놀라 방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서진아- 밥 먹자.”

“......”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체 방문 손잡이만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서진아-”

“네-”

할아버지의 부름에 이어 할머니의 두 번째 호출에 간신히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거실 가운데는 크고 둥근 상이 두 개나 놓여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정성스레 끓인 국과 몇 가지의 나물 반찬이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아침은 대충 먹고 음식 해서 맛있게 먹자.”

할머니는 어색해하는 그를 보며 편안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마주 앉은 그녀는 고슬고슬한 밥을 국에 말아 야무지게 오물거리며 꿀꺽꿀꺽 맛있게 먹었습니다. 새침한 생김새와 달리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그는 또 좋았습니다.

“고3이라 집에 안 간 모양이네.”

“네...”

“우리 희진이도 내년에 고3이네 벌써..”

그녀의 이름과 나이를 알게 된 것이 기뻐했습니다.

도란도란 정을 나누는 가족들 틈에서 그는 점심, 저녁, 추석날 아침에도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추석날 아침에는 그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어릴 때 읽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녀는 선녀처럼 예뻤습니다.

그는 그녀를 마음에 담고 또 담았습니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그 ⓒ최선영

시골에서 형이 온다는 말에 마중을 나갔다 들어왔을 때 그녀는 떠나고 없었습니다. 구멍이 뚫린 것처럼 마음에 바람이 슝슝 들어오는 느낌은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그새 가버리다니... 말도 한 번 못해보고 그냥 밥만 같이 먹었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그 막연한 기다림을 마음 한편에 소중히 간직한 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시골에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그녀가 다녀갔습니다.

다시 추석이 되고 그는 그녀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고3이라 많이 바쁠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습니다. 시골을 다녀온 설에는 그녀가 또 왔다 갔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 때도 그는 그녀와 계속 엇갈렸고 만나지 못했습니다.

대학 2학년 군 입대를 앞둔 추석,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시골에 내려가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추석 전날, 처음 만난 그때처럼 그녀를 만났습니다. 조금 더 자란 아이들은 여전히 마당에서 뛰어놀았고 그녀도 여전히 창가에 앉아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할까...' 망설이는 틈에 그녀가 사라졌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당을 지나 거실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습니다.

“서진이도 이리 와서 송편같이 만들래?”

“아.. 네.”

창가에서 사라진 그녀는 집안에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외국에 있다 귀국한 외삼촌을 보기 위해 외가에 부모님과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집 뒤쪽에 차를 주차해서 뒷문으로 나간 모양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서늘해졌습니다.

그녀를 만나지 못한 체 군인이 되었고, 휴가 때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왔습니다. 혹시나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늘 실망만 안겨주었습니다.

그의 자취방은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제대를 하고 다시 그 방으로 들어오고 싶었지만 지금 있는 사람을 나가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명절 때마다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도, 지나가는 길이 아닐 때도.

몇 번을 망설이다 그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희진이 아빠가 미국 본사로 가게 돼서 희진이도 어학연수 겸해서 같이 갔어."

그날, 그녀와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자신이 미웠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의 마음은 늘 그녀를 그리워했습니다.

희진이 다시 한국을 나 온 그 해, 추석.

할아버지 할머니는 서진의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착한지.. 우리가 잘해준 것도 없는데 때마다 인사를 오고.. 세월이 몇 년인데...

지난 설에도 다녀갔잖아. 세를 줘도 저렇게 인사 오는 사람은 첨이야.

반듯한 학생이다... 했더니만 저렇게 듬직하게 커서 잊지 않고 찾아오고..“

“누구요?”

미국에서 돌아온 희진이 할아버지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그 왜.. 학생 있었잖아. 서진이라고.”

“아...”

“어머, 양반은 못되겠네. 호호”

할머니 말에 온 가족의 시선이 마당을 향합니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그의 눈에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그녀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는 그녀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시간을 내달라는 그의 말에 가족들도 그녀도 놀랐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녀를 보고 좋아했다는 말에 가족들은 반가워하며 그녀의 등을 떠밀며 둘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그와 그녀 ⓒ최선영

“저....”

“저부터 말할게요. 좋았어요. 처음부터 그냥 스치는 감정쯤일 거라고 가볍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렇게 긴 시간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걸 보면 그런 거 아닌 건 아시죠? 옆에 다른 사람 없다면 제가 그 자리 앉고 싶습니다.”

“저.. 저는...”

“제가 싫으신가요?”

“아니, 싫고 좋고 가 아니고.. 제가 장애가 있다는 걸 아셨어요? 아마 오늘 처음 아셨을 텐데...”

“네.. 그게 뭐가요? 무슨 문제가 되나요? 난 희진 씨가 비장애인이라서 좋아한 게 아니에요.

그냥 좋았어요. 지금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뭐가 달라져야 하죠?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냥 희진 씨 마음만 열어주세요. 제가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랑하는 희진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와의 사랑에는 많은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 어려움은 그녀가 장애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름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 때문에 따라오는 편견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 편견의 벽을 하나하나 허물며 그는 그녀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사랑이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귀한 인연을 만들어 준 추석, 다시 찾아오는 추석에도 그와 그녀의 사랑으로 더 풍성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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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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