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고백을 했다. 침묵이 답했다. 돌아섰다. 남자답게. 씁쓸함은 그래도 남는다. 여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막연한 희망이 남아있다고 믿기에. “미안하다”란 비수가 심장에 박히진 않았기에.

장애인이 품는 사랑의 감정을 이토록 현실적이고도 평범하게 그린 작품은 없었다.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 얘기다. 극중 예선우는 장애가 있음에도 어머니의 헌신으로 정형 전문의 자격까지 딸 수 있었다. 그는 형의 친구이자 선배인 이노을을 사모했다. 강의실에서 처음 만난 이노을은 의자와 붙은 책상을 돌렸다. 덕분에 뻥 뚫린 책상 앞부분으로 휠체어가 쏙 들어갔다. 이 순간이었다. 노을이 선우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

사랑의 시작은 찰나가 결정한다. 매일 보던 사람이 이성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매일 봐왔던 사람도 갑자기 달라 보이게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장애인도 엄연한 사람이다. 이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한데 비장애인 중엔 이러한 사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또 장애인은 장애인끼리 사귀어야 한다는 편견도 존재한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커플을 보며 어느 할머니가 말했단다. “사람은 같은 사람끼리 사귀어야 한다”고 말이다.

뉴스를 정하는 가치 중 하나가 희소성이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보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게 더 큰 뉴스가 되는 이유다. 이런 면에서 언론이 비장애인과 장애인 커플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보도한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더불어 이런 뉴스에 많은 대중이 보이는 놀랍다는 반응에 내포된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만 하다.

말에는 뼈가 있는 법이다. 장애인과 사귀는 비장애인을 대중은 “천사”라고 일컫는다. 국어사전은 천사를 ‘종교에 있어서,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祈願)을 신에게 전하는 영적인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에 입각하면 장애인과 교체하거나 결혼한 비장애인은 신과 장애인의 중개자다. 여기서 신은 평범한 비장애인들이다. 이들은 직접 장애인을 만나는 행위를 꺼려한다. 그래서 소수의 비장애인들을 천사로 만든다. 그리곤 그들에게 중개자의 의미를 강요한다.

사랑은 보호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장애인의 소유권은 부모나 형제에서 사회복지사나 비장애인 연인에게로 넘어간다. 장애인 자신은 자립(自立)하기 어렵다. 관계는 수직적이다. 사랑을 주고, 받는 게 연애요, 결혼이다. 수평적 관계에서나 가능하다. 하나 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결코 수평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연애가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천사보다는 전사에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이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받는 은근한 무시와 불공정한 대우를 지켜봐야 한다. 때로는 신체의 장애로 힘겨워하는 모습에 눈물 흘리는 순간도 있으리라. 이런 상황에 사랑하는 이를 빠트리기 싫다는 이유로 장애인들 중엔 고백을 꺼려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짜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우리가 사랑에 익숙해진 건 삶이 외롭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린 연애를 하고, 삶을 산다.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다시 <라이프> 얘기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예선우는 후회할까봐 고백했다. 혹자들은 이를 두고 이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죽을병에 걸렸는데, 여자는 어떻게 책임질 거냐는 비아냥도 분명 듣게 되리라. 하지만 가끔은 그럴 필요가 있다. 사랑에 익숙해지고 싶은 사람이니까. 장애인도 사람이니까. 전사의 후예들은 사랑만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길 바라본다. 천사도, 전사도 아닌 평범한 이성과 연애하고,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꿈을 장애인들은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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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용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대학생 페이스북 페이지 ‘나도 칼럼니스트’에 5년간 기명칼럼을 연재했다. 2013년 12월부터 1년 간 KBS <사랑의 가족> 리포터로, 2017년 5월부터 약6개월 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블로그 기자로 활동하며 장애 문제를 취재해 사회에 알리는 일을 했다. 장애 청년으로 살며 느끼는 일상의 소회와 장애 이슈에 대한 생각들을 칼럼에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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