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폭주 라디오’ 공연 포스터 ⓒ장애여성공감

한낱 언어란 것은 그 무한한 소통의 가능성 앞에 얼마나 불완전하고 사소한 수단에 불과한가. 무대 위에서 혼신을 다하는 극단 ‘춤추는 허리’ 그녀들의 몸짓을 보며 나는 편협한 내 언어를 부끄러워했다.

그녀들이 발화하는 모국어를 마치 외국어처럼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마지막엔 온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누구보다 커다란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뜨겁고 벅찬 공감의 박수를...

처음 무대가 펼쳐진 순간, 당황스럽게도 나는 온몸을 뒤틀며 필사의 연기를 펼치는 그녀들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안에서 내가 마치 이방인이 되는 아주 낯선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극단 ‘애인’이 의도적으로 느린 말투와 몸짓으로 ‘이게 바로 우리 방식이니 너네가 이해하라’고 관객에게 요구하는 방식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느리고 서툰 것을 넘어 그것은 마치 외계의 생경한 언어처럼 들렸다는 것... 결국 연기하는 그녀들 무대 위로 흐르는 자막을 읽고서야 나는 겨우 그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연기자들이 훈련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훈련 중 하나가 바로 언어 훈련이다. 정확한 발음으로 관객에게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서 볼펜을 물고 사탕을 물고 피나는 발음훈련을 한다. 그렇게 정확한 발음은 연기의 기본이고 정석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런 통념을 극단 ‘춤추는 허리’의 그녀들은 무대 위에서 신랄하게 깨고 있었다. 아니, 내가 깨지고 있었다. 그깟 언어가 뭔데...? 언어가 없어도 가능한 세계, 언어라는 방법 외에도 무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걸 그녀들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불만폭주 라디오’는 라디오 DJ가 청취자의 사연을 받는 방식의 세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서른 즈음에’는 내가 일한 대가로 받는 월급을 내 통장으로 받고 스스로 관리하고 싶은 서른 즈음의 발달장애 여성 영진의 이야기다.

그녀가 자기만의 통장 만들기에 도전하며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로 코믹하게 구성돼 있는데 장애인 당사자에게 있어 자기결정권의 의미를 묻는다. ‘나’를 인식해야 볼 수 있는 자기결정권, 결국 나로부터 출발하는 얘기다.

두 번째 이야기인 ‘성공한 여자의 하루’ 역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비장애인 남성과 결혼한 중증장애 여성의 힘겨운 육아와 삶을 그렸는데 비장애인 남성과의 결혼을 소위 ‘성공’이라 여기는 일부 민망한 인식을 꼬집는 제목부터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리고 그 안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장애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로 풀어낼 수 없는 우리만의 이야기여서 그것만으로도 크게 박수쳐 주고 싶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대체 어느 누가 그런 세심한 디테일을 알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예술가입니까’는 예술가로서의 자기 자신과 예술의 의미를 물었다. 10년 차 장애인 연극배우 나예슬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이야기된다.

10년 동안 결국, 비장애인의 공연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온 게 아닌지, 그렇다고 그럴듯하게 흉내 내지 않으면 외면당하는 것은 아닌지... 나예슬의 진솔한 고민은 나의 고민과도 깊이 닿아 있어서 내내 공감하며 빠져들었다.

공연을 마치고 ⓒ차미경

장애인만 이해할 수 있는 게 무슨 예술이야? 관객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로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지나친 거 아니야? 이해를 시키는 게 아니라 이해를 구하는 게 예술이야? 그러면서 무슨 예술가야?... 누군가는 그렇게 비판하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이야기 나예슬의 고민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과연 나는 예술가일까?... 그리고 결국 그녀가 깨닫는 해답은, 예술은 ‘나에 대해 고백하는 것’, 끝없이 나에 대해 고백하는 ‘나는 분명 예술가’라는 것이다.

그렇다. 예술이란 결국 개별적인 개인들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자기 고백의 표현과 다름 아니다. 나의 목소리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그런데 장애인의 예술과 문화를 폄하하는 목소리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 보다’ 더 활발하게, 월등하게, 뛰어나게...

아직 우리의 의식은 여기에 갇혀 있기 때문에 ‘장애인의 예술’을 또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 있어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애는 있는 그 자체로 이해되고 인정받아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해야 하거나, 비장애인과 비교해서 ‘비장애인보다’ 더 우위여야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왜 항상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비교하여 넘어서고, 극복해야 하는가?

“하지만 놀랍게도 장애인의 몸으로 의족을 달고 비장애인들을 제치는 육상선수가 있습니다. 피스토리우스는 항상 자신의 꿈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그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정욱 ‘장애, 너는 누구니?’ 중에서)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쓰인 책의 내용 중에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에 관한 설명이다.

육상선수로서 피스토리우스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대단한 일이지만 왜 장애인은 장애와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그렇게도 애써 능력을 증명해내야만 하는가.

피스토리우스 같은 일부 특출한 사람 말고 과연 그런 능력을 발휘해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왜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을 제쳐야 하고, 비장애인에 비해 뛰어나려 굳이 애써야 하는가 말이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 장애인 활동가 페이스북에 ‘비장애인보다 못하는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고 누군가 달아준 칭찬 댓글을 보며 문득 한숨이 나왔다. 왜 우리는 스스로 ‘비장애인 보다’ 더 잘 해내야만 하는 틀 안에 우리를 가두고 있는가...

그런 눈으로 장애인의 공연 예술을 보면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야’는 양손이 모두 원활한 비장애인 피아니스트보다 뛰어날 수도 없고 그들을 능가할 수도 없다. 단 한마디의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춤추는 허리’의 그녀들은 진정한 배우로 인식될 수도 없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우리가 징그럽게도 꽁꽁 갇혀 있는 소위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나서 보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결코 언어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온몸으로 훨씬 더 직설적으로 간절하게 더 많은 말들을 해낸 ‘춤추는 허리’ 그녀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예술은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나에 대한 고백이며 그 고백이 누구의 것이라도 개성적인 예술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비교가 아닌 그 자체로서가 예술이며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분명 예술가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공감하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의 품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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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경 칼럼리스트 ㅅ.ㅅ.ㄱ. 한 광고는 이것을 쓱~ 이라 읽었다. 재밌는 말이다. 소유욕과 구매욕의 강렬함이 이 단어 하나로 선명하게 읽힌다. 나는 내 ‘들여다보기’ 욕구를 담는데 이 단어를 활용하겠다. 고개를 쓰윽 내밀고 뭔가 호기심어리게 들여다보긴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동작, 쓱... TV, 영화, 연극, 책 등 다양한 매체가 나의 ‘쓱’ 대상이 될 것이다. 그동안 쭈욱 방송원고를 써오며 가져 왔던 그 호기심과 경험들을 가지고... (ㅅ.ㅅ.ㄱ. 낱말 퍼즐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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