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첫 글 이후의 뒷이야기를 전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링크를 올려놓으니 모두들 호의적인 반응이었고, 한국장애인개발원 직원들도 글을 잘 썼다고 칭찬하는 등 모두들 비행기를 태워주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오늘의 이야기와 상관없다.

각설하고, 원래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일 하다 알게 된 소식이 나에게 충격을 주는 바람에 순서를 급히 뒤섞게 되었다. 갑작스런 일에 대응하느라 독자들과의 약속을 졸지에 어긴 셈이니, 독자 분들께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린다.

사실 이 사건을 들은 나의 입장은 “너무나도 이해 못 할 사건”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 부산 모 복지관에서의, 어느 발달장애인이 가해한 아동 추락사 사건 그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 사건에 대한 보도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같은 발달장애인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지켜야 했는데도, 굳이 종교의 논리를 대입하지 않는다해도 종교들이, 또 법이 제일 나쁘게 보는 죄, 살인(살인 행위는 사형에 처할 수 있으므로)을 왜 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에 대해 아무리 상상해봐도 이 사건에 대한 분석과 정리가 매우 어려웠다.

나 마저도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이해 못 할 사건"이라는 해석을 한 것이다. 이제 나는 이러한 사건을 본 나는 그 사건의 이면에 있는 맹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 그 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망한 아동의 어머니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는데, 그것에 대한 반응이 나에게는 심상치 않게 들린 것이다. 게다가 사건이 터진 뒤로 며칠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인터넷 포털 한 곳에 ‘발달장애인’을 쳐 보니 아직도 그 사건관련 검색어가 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발달장애인과 관련된 긍정적인 검색어 리스트가 ‘발달장애인법’이니 등 굳이 몇 마디 더 붙여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이 검색어들 속에는 한 가지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발달장애인을 차별해도 된다!”라는 논리가 이면에 숨어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관련 댓글도 살펴봤는데, 여기서는 차별성 표현이 난무하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공개하지 않겠지만, 발달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옹호하는 내용, 발달장애인을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내용, 발달장애인을 시설에 가둬야 한다는 내용의 댓글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번 일에 대한 처벌은 응당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발달장애인 전체를 탄압할 수 없다는 것을. 발달장애인과 함께 있는 세상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에선 발달장애인도 한 사람에게나마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을.

이 점이 바로 내가 걱정하고 있는 일이다. 이러한 사건이 쌓이고 쌓여 “발달장애인=예비 범죄자” “발달장애인=사회통합을 시켜서는 안 되고 시설에만 가둬야 하는 사람들” 같은 차별과 침해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일을 만들 것을 알기에 나는 그것이 진정 두렵다.

원래 오늘 하고자 했던 이야기이자 다음 시간에 다시 이야기를 할 내용은 “발달장애인은 똑같이 다르다!”라는 사실이다.

오늘 이야기와 연결시켜서 살짝 ‘스포일러’를 한다면, 발달장애인들은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발달의 상태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태도의 인식도 전혀 다를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 어떠한 발달 환경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것은 ‘똑같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둬야 할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인지 능력도 ’똑같이 다르다’. 즉, 사회성 발달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에 따라 사회성의 성취 지수도 ‘똑같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는 이제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진행 중이라고도 들었다. 댓글 중에는 차별을 합리화하는 댓글 외에도 처벌하라는 댓글도 달렸다.

그렇지만 법 앞의 평등이라는 대한민국 헌법의 대 원칙 앞에서 볼 때 그 가해자는 내가 판사라 하더라도 장애 특성을 감안할 수 있겠지만 “유죄판결”이라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그것은 복지관의 책임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내던진 것은 사실이며 의학적으로도 그 행동이 아이의 사망 원인이었음이 인정되었으니 이것은 빼도 박도 못 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사회가 발달장애인에게 대해야 할 태도는 차별도, 무시도, 배제도, 시설 강제 입소도 아닌 역설적이게도 사회통합이라는 것이다. 아예 사건 발생의 싹을 잘라낼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통합이라는 단어에는 최종적으로 발달장애인도 사회의 규범을 지킬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장애인들에게 부탁한다. 우리 발달장애인들도 여러분 곁에서 함께 살고 싶다. 그러한 사건은 단 1인에 의한 사건이지 발달장애인 모두가 벌인 사건은 절대 아니다. 그것에 대한 대가는 그 1인만 치르면 될 문제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를 차별할 수 없고, 우리를 배제해서는 안 되며, 무시할 수 없고, 시설에 강제로 보내는 것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언론에도 부탁한다. 이 사건을 발달장애인 1인의 문제가 아닌 “발달장애인=범죄자”라는 공식으로 만들어낸다면 아마 발달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약속할 수 있다. 발달장애인인 우리도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서는 지킬 것이라는 것을. 내가 소중하듯이 당신도 소중하기 때문에.

발달장애인들을 나쁘게 보지 말아 달라. 이 세상에서 그 사건을 벌인 발달장애인은 단 1명뿐이다. 모든 발달장애인이 벌인 것이 절대 아님을 다시금 밝힌다.

마지막 한 문장을 이야기 하고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다. 원래는 냉전초기 미국이 시행했던 세계사적인 사업인 마셜 플랜(실제로 이 계획을 추진한 조지 마셜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은 195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필자 주)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포스터의 표어였는데, 지금 이 순간 우리 발달장애인들도 그 말을 해 주고 싶다.

"날씨가 어떻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

“Whatever the weather We must move Together!"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2015년 계약 만료로 한국장애인개발원을 떠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이후 장지용 앞에 파란만장한 삶과 세상이 벌어졌다. 그 사이 대통령도 바뀔 정도였다. 직장 방랑은 기본이고, 업종마저 뛰어넘고, 그가 겪는 삶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파란만장'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장지용의 지금의 삶과 세상도 과연 파란만장할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픽션이지만, 장지용의 삶은 논픽션 리얼 에피소드라는 것이 차이일 뿐! 이제 그 장지용 앞에 벌어진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