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출신 방송인 이나 마슬로바 씨와 함께. ⓒ장지용

안녕하세요. 장지용이라고 합니다. 에이블뉴스에서 1년 동안 '발달장애인 장지용의 삶과 시선'을 전하면서, 여러분의 소리도 들으면서 함께 발달장애인이라는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는 의아해할지도 모르는 분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만난 발달장애인은 그렇지 않은데, 왜 이 발달장애인 장지용이 이 자리에 나왔는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첫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제 삶과 그 와중에 얽힌 발달장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긴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고등학교 때 배운 중국어와 한국장애인개발원 입사 후 개인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울 때도 인사말과 함께 이름을 묻는 표현을 처음 배웠기도 하고요.

제 이름은 앞에서 말했듯이 장지용이고, 제 장애 유형은 예상외이겠지만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에 가진 자폐성장애입니다.

분명히 발달장애인법에서 자폐성장애인도 발달장애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폐성장애인인 저도 발달장애인에 해당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27살이며, 인천에서 태어난 남자이고, 현재 한국장애인개발원 중앙장애아동발달장애인지원센터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 장애에 대해서는 장애, 특히 발달장애를 잘 아시는 분들이나 제가 밝히거나 둘 중이 아니라면 아무도 제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만큼 몇몇 발달장애인들은 발달장애인인지 아닌지조차 모릅니다. 그렇지만 겉으로도 발달장애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후천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후천적인 문제는 다음번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장지용

제 어머니께서는 제가 자폐성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4살 때 아셨고(참고로 제가 자폐성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어렴풋이 알았고 제대로 안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전까지 재활프로그램에 많이 보내셨고, 어린이집에 다닐 때에는 오후에 조기교육원에 보내서 재활교육 프로그램을 받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서울에 있는 재활서비스 제공기관에 데려가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저를 장애가 있다고 다르게 대하지 않고 비장애아동과 똑같이 양육을 하셨습니다.

저는 통합교육을 받았고 특수학급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도 있었습니다만, 정식으로 특수교육대상자로 인정받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중간에야 그랬습니다. 그리고 특수교육대상자로 인정받은 뒤에도 특수교사에게서 지도 받은 것은 교과가 아니라 생활지도만 받았습니다. 교과는 그대로 비장애학생과 같이 받았습니다.

많은 장애아동 부모들의 가장 큰 소원인 비장애학생과의 완전통합 수업을 무리없이 받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아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나서부터는 수학시간에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기 어려웠고, 영어는 문법 등이 약해서 성적이 안 좋았었고, 비장애학생들 중 저를 이해하지 못하던 학생들로부터 집단 따돌림, 즉 왕따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집단 따돌림의 상처는 고등학교를 떠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을 정도니까요.(참고로 대학도 다녔는데, 그 때는 왕따가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사 경시대회 상장과 메달. ⓒ장지용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공부로 승부를 걸 수 있기도 했었습니다. 다른 과목의 성적은 비장애학생 수준이었고 특히 사회나 한국사(그 때는 국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만) 과목 성적은 다른 학생들도 따라잡기 어려운 성적, 즉 최상위권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집단 따돌림을 다른 발달장애학생에 비해서는 덜 당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발달장애학생들의 학업성적이 낮은 것도 빌미가 되어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집단 따돌림의 상처는 그래도 깊었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이제는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인 2005년 8월 13일, 제 삶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11년차가 되는 사진작가 경력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에 가서 지금은 폐암으로 돌아가신 한 사진작가에게서 사진을 배우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했습니다.

삶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제일 먼저 드러난 성과는 그 때는 국사라고 불렀던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한국사 과목에서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심지어는 수행평가도 만점을 받아 학기말 성적표에 100점이라고 찍혀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거침없는 진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어려웠던 국사편찬위원회 주관 경시대회를 통과하고, 사진전시회를 치르며,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진학하고 그랬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만나게 되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한 쾌속 질주는 2008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러시아 유학생과 함께. ⓒ장지용

2008년, 즉 대학 1학년 때 이성관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한동안 공격을 당했고, 1년 더 대학에서 버텼지만 결국 2학년을 마치고 1년 휴학을 한 뒤에야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그 때의 두 번째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습니다. 최근에야 그 때 당사자들과 화해를 할 정도였으니까요.(아직 완벽한 화해는 아니지만)

아마 그 때의 원인은 발달장애인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사회성 강화 프로그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듭니다.

그 사건의 충격으로 무엇인가를 깨달은 저는 대학생활을 잘 하고, 동아리 활동에 참여했고, 심지어는 정당 활동에도 투신할 정도였습니다.(물론 지금은 장애인개발원에서 일하기 위해 정당 활동은 청산했습니다만 그 때 활동했던 동료들과는 연락을 주고받긴 받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하면서 일자리를 찾다가 장애인개발원에서 일자리 공모를 보고 지원해서 면접 끝에 붙어서 지금 이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회성까지 스스로 부딪혀가면서 만들어야 했고, 자폐성장애라는 상대를 몇몇 도움을 받긴 했지만 거의 혼자서 싸워가면서 거의 스스로의 손으로 일궈내야했고,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들을 묶어서 부를 제목을 ‘나 스스로 산다’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여러분과 함께 발달장애인 장지용의 삶과 시선을 만날 것입니다. 그 여정에 함께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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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계약 만료로 한국장애인개발원을 떠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이후 장지용 앞에 파란만장한 삶과 세상이 벌어졌다. 그 사이 대통령도 바뀔 정도였다. 직장 방랑은 기본이고, 업종마저 뛰어넘고, 그가 겪는 삶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파란만장'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장지용의 지금의 삶과 세상도 과연 파란만장할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픽션이지만, 장지용의 삶은 논픽션 리얼 에피소드라는 것이 차이일 뿐! 이제 그 장지용 앞에 벌어진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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