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같이 가자했던 친구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장항선 대천역을 지나는데 문득 친구와의 약속이 생각나 카톡을 했다.

“나 지금 군산가는 무궁화호 타고 대천역 지나가고 있어” 바로 답장이 왔다 “오~좋네! 군산, 부럽네. 날씨도 좋고” 친구의 부러움과 지난날의 추억도 기차에 실고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도 15년 전쯤 군산여행 갔었거든” 그 때 군산역은 작은 간이역이었고 여객선 터미널도 근처에 있었다. 당시엔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도와 역 근처 벼룩시장을 둘러보는 가을여행이었다.

군산역에서 내려 선유도로 가는 배안에서 얼마나 즐겁고 행복해했던지 지금도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입가에 미소기 번진다. 지금 군산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열차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콩닥콩닥 가슴이 띈다.

세월이 갈수록 추억을 왜 자꾸 반추하게 되는지, 추억의 장소와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번 군산여행도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의 추억과 15년 전 나의 추억을 찾아 시작됐다.

친구의 고향은 군산 옆 동네 서천이었다. 그래서 군산 여행할 때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지만 친구는 다른 일정 때문에 당분간 여행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혼자만의 여행은 쓸쓸했지만 기억 속 추억을 더듬으며 떠났다.

군산에 도착하니 역사는 현대식 건물에 편의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편리해진 역사는 새롭지만, 작고 소박했던 옛 흔적을 찾을 길 없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진포해양공원으로 이동했다.

택시 안에서 본 군산풍경은 변함이 없어 보였고 휠체어 사용 후 군산엘 꼭 다시 오고 싶었던 바람은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진포해양공원에 도착해 갯벌이 드러난 바다를 행해 인증 샷을 날렸다. 뜬 다리를 건너 바다 가까이에 가려했지만 물이 빠진 갯벌엔 뜬 다리만이 갯벌과 밀착돼 내려 앉아 있었다.

뜬 다리는 군산 내항에 있는 다리로 밀물때 다리가 수면만큼 뜨고 썰 물때는 내려가는, 자동으로 조절되는 선박의 접안시설이다. 1899년 군산항 개항이후 3천 톤급 배 4척이 동시에 접안 할 수 있는 4개의 다리를 이용해서 하루 백 50량의 화물차를 이용하여 호남평야의 쌀들을 일본으로 수탈해 간 가슴 아픈 역사의 산 증거물이다.

내 항에 자리한 진포해양공원에는 뜬 다리 앞에 해군상륙함인 유봉함이 해양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유봉함은 근대역사 벨트의 8코스다.

유봉함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하얀 제복을 입은 해군이 떡 하니 버티고 있어 깜짝 놀랐다. 밖은 밝고 안은 조금 어두워서 그랬는지 제복을 입은 마네킹을 사람으로 착각했다. 사람은 어떤 복장을 하느냐에 따라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도 한다.

단정한 제복차림은 상대에게 신뢰와 안정감을 주기도 하고 때론 위협을 주기도 한다. 안정감을 주는 제복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경찰이나, 군인, 소방관이 가장 대표적인 제복일 것 이다. 그렇게 때문에 왠지 모를 신뢰가 간다.

잘 생긴 해군 마네킹과 악수를 하고 전시실 내부로 들어섰다. 전시관엔 한반도 해군의 진화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조선최초 화약제조 과정에서부터 영화 명량으로 더욱 관심을 끄는 이순신의 명량해전까지 알기 쉽게 나열돼 있고 광복 이후 해군의 변천사가 한눈에 들어 올 수 있게 전시돼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서둘러 다음코스로 이동했다.

역사문화 벨트는 근거리에 있어 휠체어로 이동하기 편리하다. 이번엔 장미 갤러리로 갔다. 장미갤러리는 일제 강점기 때 용도나 기능을 알 수 없는 건물을 해방 이후 위락시설로 사용하다가 작년에 보수와 복원을 거쳐 체험학습장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갤러리 안에선 공방도 있어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 다양하고 예쁜 물건을 만들어 전시 판매하고 있다. 공방에서 만들어진 약낭주머니는 전시실 한켠에서 단아하게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작은 주머니 속에 들어갈 약초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예전엔 약낭주머니에 약초뿐만 아니라 작고 아담한 물건을 넣고 다니지 않았을까. 고운 천에 고운 수를 놓고 매듭으로 잘 묶어 고쟁이 주머니 속에 넣고 그 위를 옷핀으로 고정해서 꼭꼭 숨겨 놓던 외할머니 약낭주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 약낭주머니엔 사탕은 물론 동전, 은가락지, 옥비녀까지 다 있었다.

그 때 할머니의 주머니는 알라딘의 램프처럼 주문만 외우면 무엇이든 나오는 요술램프 같았다. 한번은 할머니 약낭주머니 속이 궁금해서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주머니를 꺼내려다 할머니께 혼쭐이 난적도 있었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 치마 속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뚝딱 하고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같았다. 그때 봤던 약낭 주머니가 장미 갤러리 공방 문짝에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약낭주머니 속에서 끝도 없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장미갤러리 바로 앞엔 미즈카페가 있다. 미즈카페는 옛 미즈상사 건물로 한 때 일본인 무역회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지금은 미즈 커피숍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건물 입구에 턱이 있어 휠체어 여행자가 접근 할 수 없다.

모두를 받아주지 못하는 건축물은 아름답지는 못하다. 건축물은 모든 사람을 품어주고 받아줘야 진정 아름다운 건축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품어주는 진정한 휴먼건축물은 겉과 안 모두에서 온기가 느껴지고 인간애로 가득하다.

미즈카페는 작고 예쁘지만 아름답지 못한 건축물이다. 북카페를 겸하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분명 별로일 것이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처럼 휠체어 접근이 안 돼는 곳은 분명 맛도 없고 분위기도 별로일 거라고 중얼됐다.

그런데 미즈라는 단어가 익숙하게 들려온다. 미즈사랑이라는 광고가 생각났다. 광고에선 여자들의 비밀 공간 여우식당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부케를 들고 들어온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속았다며 울기 시작한다. “속았어요. 그런 남자랑 좋아하다니, 나 같은 바보는 그냥…….” 하고는 고갤 떨구는 그녀. 온통 눈물 투성이로 신부화장은 지워지고 마스카라가 번져서 검은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던 여주인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뭔가 만들기 시작한다. 여주인이 만들어낸 음식 전복구이를 건네주며 그녀에게 한마디해준다. "인생을 귀하게 생각해요." 라는 멘트로 마무리 되면서 쭈굴이 개 퍼그가 휴지를 입에 물고 눈물투성이 신부에게 건네는 이미지로 마무리 된다. 그 때문일까 미즈상사라는 단어는 익숙해서 저절로 광고멘트가 흥얼거려진다.

미즈카페 앞에 있는 빨간 등대에서 3코스 스탬프를 찍고 장미공연장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미즈카페와 장미갤러리, 장미공연장까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어 스탬프 찍기란 식은 죽 먹기처럼 수월하다.

골목 안은 아기자기한 조각과 주사위 의자가 있어 여행자에게 쉼을 제공한다. 골목풍경도 우리네 골목풍경과는 다르다.

일본 어디쯤 한가로운 골목길을 걷는 것처럼 주변 건물은 온통 일본식 건축물이고 분위기도이색적이다. 골목을 사이 둔 4곳 모두 쾅쾅쾅 인증 스탬프를 찍고 근대 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근대미술관은 (구)일본 18은행 군산지점이었다.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숫자 18은 은행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한다. 군산지점은 조선에서 일곱 번째 지점으로 1907년에 설립됐다. 2008년 이후 보수와 복원을 통해 군산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은행 별관 건물과 숙직동 건물은 안증근 기념관과 근대건축자재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술관 입구에서 스템으를 찍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술관 안엔 건물역사 전시실과 한지화가 문복철 유작품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먼저 건물역사 전시실부터 봤다. 전시실엔 은행으로 사용됐던 건물의 용도를 알 수 있게 은행 지점장실도 있다. 지점장실 밖으로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강제징용하면서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 속 조선인들은 훗가이도 나카가와의 한국인 토목노동자 강제 징용자들이다. 그들의 몸은 상처투성이고 제대로 먹지도, 치료도 받지 못해 아사직전의 몸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너무 말라 갈비뼈가 다 드러나 있어 보는 것 자체가 충격이다.

게다가 중국 운남성, 텅충현, 미얀마 국경일대에서 일본군이 학살한 조선인 시체를 바라보는 중국군인들 표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간이 어디까지 사악해 질수 있고 어디까지 악마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또 한 장이 사진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소년산업전사로 일본에 강제징용 노동자로 보내진 한국인 소년들이다. 사진 속 소년들은 영혼 없는 혼령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나이에 가족과 강제로 떨어져 이국만리 낮선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었으니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이 얼마나 한스럽고 고통스러웠을까.

2차 대전 당시 나치는 6백만 명을 학살했고 일본군은 2백만 명을 학살했다. 1939년 극비 지령문서에 히틀러가 서명하면서 T_A 프로그램은 시작됐다. 장애인 살해 프로그램은 히틀러가 극악하기 짝이 없는 악마란 걸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장애인, 정신질환자 등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 살인 허가 명령서였다. 그들은 장애인등을 제거함으로 게르만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인종위생학(독일 버전의 우생학)을 나치즘의 기본으로 삼았다.

나치정권은 "살 가치가 없는 밥벌레들(useless sater)"을 죽이는 것은 자비로운 안락사로 간주했다. "병자나기 기형아를 전멸시키는 것이야 말로 병적인 인간을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 배나 자비로운 일이다. by 히틀러" 나치 독일이 1933~1945년 패망 때까지 국가경제에 부담이 된다며 살해한 장애인의 수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나치에 뒤질세라 일본군은 2백만 명을 학살했다. 나치와 엎치락 뒤치락 누가 더 악랄한 짓을 많이 하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강제로 징용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군대 위안부로 끌고 가 성적 학대를 일삼는 인간 말종의 짓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 땅 안에 자원은 모조리 항구나 열차를 통해 가져가고 심지어 수저 젓가락까지 빼앗아 전쟁무기로 다시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고도 반성은커녕 아직도 자신들이 한 짓을 공공연하게 자랑거리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들의 진정성 없는 사과는 아직도 현존하는 역사의 증인인 위안부 할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꽂고 있다.

언제쯤 그들은 진심어린 사과로 그들의 행동을 반성할까. 18은행 군산지점은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함께 일본의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일제는 전쟁준비를 위해서 조선을 수탈기지화 했고 자본, 자원, 인적자원 등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수탈했다. 근대 미술관은 이러한 일제의 만행과 그로인한 우리민족의 상처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공간인 것이다. 아픈 과거로 가득한 미술관을 빠져 나와 근대 건축관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 계속>

•가는 길

용산역, 수원역에서 장항선 무궁화호 3호칸 이용

요금 복지할인 적용 왕복 1만 2천 원

군산역에서 장애인 콜택시 이용 063-471-8187

등록절차 후 이용

•먹거리

역사벨트 동선 안에 있는 복성루 ‘물 짜장’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1945년생 이성당 빵집, 단팥빵, 야채빵

•장애인화장실

근대역사 박물관, 근대 건축관, 진포해양공원.

•문의

휠체어 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뜬 다리. ⓒ전윤선

유봉함 전시관. ⓒ전윤선

장미갤러리 약낭 주머니. ⓒ전윤선

미즈 북 카페. ⓒ전윤선

골목 풍경. ⓒ전윤선

강제 징용된 토목 노동자들. ⓒ전윤선

강재 징용된 소년 산업 전사. ⓒ전윤선

3.1 만세운동. ⓒ전윤선

독립운동 선조들. ⓒ전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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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선 칼럼니스트
여행은 자신의 삶을 일시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일상을 벗어나 여행이 주는 해방감은 평등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 접근성을 높이고 인식의 장벽을 걷어내며 꼼꼼하고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돈 쓰며 차별받지 않는 여행, 소비자로서 존중받는 여행은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모두를 위한 관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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