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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사랑을 부른다
카테고리 : 지금여기 칼럼 | 조회수 : 21782010-01-30 오후 2:02:00
사랑이 사랑을 부른다

 

- 교회, 그분의 복음적 기쁨 그 치유의 감성 회복해야

 

2009년 06월 29일 (월) 정중규 mugeoul@hanmail.net

   
지나간 내 삶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늘 위로자이셨다. 첫돌을 앞두고 소아마비로 입게 된 장애로 인해 청소년시절 십여 년 동안 한없는 절망과 아픔 속에 뒹굴다 끝내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방황하며 헤맬 때, 그 죽음의 늪에서 결국 건진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성경에서 발견한 그분의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 한마디였다. 성경 곳곳에서 위로자로서의 그분 모습을 확인하고서 느꼈던 기쁨의 그 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과연 성경에는 마치 그 일을 하러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절망에 빠지고 슬픔과 아픔에 짓눌려 있는 병자들과 죄인들에 대한 그분의 위로와 격려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분이 그 시대의 그들에게 주님이 되신 까닭이 당신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으시며 사랑으로 양들을 살찌운 참된 목자이셨기 때문이다.

그분 말씀은 대개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네 죄를 용서 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라.” “울지 마라.” “평안히 가거라.” 등등이다. 진복팔단은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와 같이 용기를 주는 말씀이고,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것 역시 한없는 희망을 주는 말씀이 아닌가. 그럴 때 그분의 모습은 마치 주눅들은 자식의 기운을 돋우어주는 엄마와 같으니, 목자 없는 양처럼 기가 꺾여 있는 그들에게 삶의 용기와 힘을 안겨다 주어 살리시려는 것이었다. 마치 그것이 구원의 길인 양, 아니 사실 그것이 구원이다!

사랑이 사랑을 부른다.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 사랑이 사랑을 얻는다

어느 날 예수께서 한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에 간 곳에 그 동네의 죄 많은 여인이 그 소식을 듣고 뜻밖에도 찾아온다. 마치 그분만이 자신을 온전히 다 받아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이, 아니 거기 구원의 길이 있음을 직감하듯 그녀는 체면 불구하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그 곳으로 뛰어든다. 어쩌면 그분의 위로를 통해 용기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기적 같은 삶 이야기들을 많이도 들었으리라. 무엇보다 그분의 발걸음마다 풍겨나는 그리스도 그 사랑의 향기가 그녀를 그곳으로 이끌었으리라.

과연 사랑이 사랑을 부른다. 사랑이 용서를 낳고 그 안에서 사랑을 부른다. 그녀는 어떠한 죄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그녀에게 어떤 용서가 왔던 것일까.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억눌림에서 해방되는 것, 마치 닫힌 뚜껑을 여는 것과 같다.

그로부터 그녀 자신에게는 용서와 치유의 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녀의 영혼은 온통 그분이 주신 그 사랑에 사로잡혀 새롭게 태어났다.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본 그녀는 그녀 역시 사랑이 되어 버렸다. 참으로 사랑이 사랑을 부른다. 아니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 그리고 사랑이 사랑을 얻는다(amor saca amor).

죄 많은 자신에게 한없는 용서를 심어주고, 한없는 사랑을 심어주고, 생명의 빛살로 죽었던 생명을 온전히 되살려주신 그 한없는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 역시 한없는 사랑일 뿐이다.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응답 역시 지극한 사랑일 뿐이다.

그녀는 그분의 뒤쪽 발치에서 서서 운다. 그녀는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린다. 그녀는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른다. 이 지극함 앞에 구원의 은총은 향유를 붓듯 온전히 내려온다. 마치 그분의 세례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듯, 그녀의 영혼, 아니 온 존재 위에 그분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의 사랑이 내려와 깃들며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녀는 옥합에 든 향유를 그분께 온통 쏟아부어드렸지만 그보다 더 한 구원의 향유를 영혼에 듬뿍 담고서 평안히 돌아갔다. 그녀는 구원되었다.

참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이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사람을 모두 구하셨다. 그 사랑이 한없는 자비심에서 샘솟았던 까닭이다. 그분의 둘레에서는 따스한 화톳불마냥 숱한 사랑의 기적들이 너무나 자연스레 일어나고 커가고 번져나간다. 그것이 부활이었다. 특히 그분을 만난 그 시대의 죄인들, 병자들, 여인들, 사회로부터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고 가물거리는 등불처럼 죽어가고 있던 그들이 그 사랑의 손길에 의해 화초가 살아나듯 부활하였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잊지 못한 그들은 그분 둘레에 머물며 그분의 몸인 교회라는 큰 나무의 싱싱한 잎사귀들이 되었다.

사랑이 부활을 부른다. 희망이 부활을 부른다. 믿음이 부활을 부른다.

   
특히 그분 곁에는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 기운 얻고서 그분을 따라다녔던 여인들이 많았다. 갈릴래아에서 골고타까지 더 나아가 죽음을 넘어 부활의 그 순간까지 잠시도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던 여인들, 그분을 너무도 사랑했던 여인들, 그러했기에 그들만이 부활하신 그분을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들 때문에 그분은 살아나셨다. 사랑이 부활을 부른다. 사랑이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희망이 부활을 부른다. 희망이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믿음이 부활을 부른다. 믿음이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활은 그들 안에서 일어난다. 그런 뒤 그 부활은 민들레꽃씨마냥 그들의 영혼을 타고서 퍼져나간다. 사랑이 사랑을 부르듯, 사랑의 연줄을 타고서 부활하신 그분은 사랑의 갈망이 있는 곳마다 찾아가시어 믿음의 꽃을 활짝 피우신다. 그러기에 부활은 첫사랑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부활은 말 그대로 복귀이다. 물론 거기에 질적 고양은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 함께 하는 마음, 사랑, 행복, 기쁨, 생명의 즐거움, 삶의 희망, 놀라운 충만, 나눔의 풍요로움, 아름다운 체험, 만남의 시간, 함께함 그 모든 것은 동일하다.

부활하신 그분은 사랑하는 모든 이를 첫사랑의 아름다운 추억의 땅 갈릴래아로 다시 초대하신다. 부활이 부활을 부른다.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부활한다. 첫사랑의 땅 갈릴래아는 부활의 꽃이 활짝 피어나는 생명의 땅이 된다.

그분 곁에만 있으면 행복했던 그 시대의 군중들처럼, 교회 안에서 행복과 생동감 느껴야

그분의 몸이요 제자인 교회가 그러했으면 싶다. 고달픈 삶에 상처입고 슬픔과 아픔에 짓눌린 채 교회의 마당에 들어서면 먼 길에서 돌아온 자식을 맞는 어머니의 모습같이 환한 얼굴로 맞아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을 지녔으면 싶다. 심판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부정적 이미지로 주눅 들게 하지 않고, 마음과 영혼이 지친 이들이 그냥 안기고 싶어지는 편안하고 따스한 어머니의 품 속 같았으면, 싶다.

그 어떤 것보다 더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분처럼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말라.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지지해 그들의 기운을 되살려 줄 수 있는 교회였으면, 싶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 나온 힘은 바로 그런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힘이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에 굶주린 이들이 자석에 끌려오듯이 무리로 모여든다. 그만큼 이 세상은 사랑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세주는 사랑의 화신(化身)이 된다. 아니 사랑의 화신은 구세주가 된다. 그분께서 그리하셨다. 사랑이 사람을 부르고 사랑이 사랑을 부르고 사랑이 사람을 얻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다시 그분의 복음적 기쁨 그 치유의 감성을 회복해야 한다. 하느님과의 친교적 관계 속에 참으로 행복해진 이들이 꽃을 활짝 피우듯 여기저기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위축된 고달픈 삶을, 교회는 바리사이로부터 상속된 ‘죄 리스트’를 고해소 앞에다 잔뜩 붙여놓고, 그분께서 신명나게 풀어놓으셨던 그 죄인들을 다시 ‘죄인’으로 오랏줄 채우고 율법주의로 옭아매면서 영혼과 마음 곧 내적 안내자는 못되고 기껏 외적 감시자나 심판자로만 자족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본말전도의 교회 안에서는 언제부턴가 ‘주홍글씨’의 A패 같은 것을 가슴에 매단 자들만 강시처럼 무수히 거닐며 어느덧 교회는 ‘죽은 열정의 집단’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그 시대의 죄인들을 만날 때마다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져 주고 죄의 멍에와 사슬에서 풀어주며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 격려하셨던 그분의 그런 사목을 우리 교회가 해야 한다. 그분 곁에만 있으면 온통 행복했던 그 시대의 군중들처럼, 교회만 오면 하느님 때문에 행복해지고 복음적 삶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때 하늘나라의 씨앗은 비로소 움트게 될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정중규/ 장애인운동가, 다음 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지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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