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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상에 희망과 구원의 이름 되어야
카테고리 : 지금여기 칼럼 | 조회수 : 22332010-02-05 오후 7:39:00

교회, 세상에 희망과 구원의 이름 되어야

 

[정중규 칼럼] 나자렛 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2009년 07월 13일 (월) 정중규 mugeoul@hanmail.net

 

   

때는 한낮이었다.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선천성 장애를 가져 꼼짝도 할 수 없는 걸인이 자선을 청하였다. 지체장애인인 그를 요즘의 앵벌이처럼 누군가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다 구걸하라고 옮겨놓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눈여겨보자 무엇을 주는가 싶어 쳐다보지만 베드로는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다. 그러자 그는 즉시 벌떡 일어나 껑충껑충 뛰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베드로는 돈 몇 푼주는 것보단 오히려 그를 ‘나자렛 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인간다운 삶에로 초대한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초대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기에 한 인간을 한 순간에 살리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불러일으켰던가! 어쩌면 그 시대의 장애인, 죄인, 여성 같이 사회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갖가지 멍에에 짓눌려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있어 ‘나자렛 사람 예수의 이름’은 노예해방선언 이상의 의미와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미국 남북전쟁 시절의 흑인노예들이나 지난 1960년대 흑인들이 아브라함 링컨이나 마틴 루터 킹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인간존엄성을 자각하며 활짝 핀 꽃처럼 상기 되었듯이, 그분의 이름은 그 자체로 새로운 삶 곧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힘이 갈릴래아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보여주셨던 그분의 지극한 사랑과 용기를 주는 말씀, 무엇보다 한평생 그들을 짓눌러왔던 죄의 멍에를 흔쾌히 벗겨주신 자유와 해방의 권능에서 비롯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소위 ‘기적의 손’과 그분의 치유기적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도 그들처럼 자기능력 과시가 아닌 오직 병자의 고통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치유행위를 펼치셨던 까닭이다.

그 사랑에 의해서 그분과 그들 사이의 연대감은 갈수록 깊어만 간다. 교회의 씨앗은 그렇게 발아되고 그들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자 그들은 모두 “아하!”하고 바로 깨달으며 박수와 환호 속에 그분을 맞아들인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같은 지도층들과는 달리 그들은 그분께서 드러내시는 하느님나라가 무엇인지, 그 내용은 어떠한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분의 말씀 자체가 마치 판소리 한마당마냥 장단 맞추듯 흥겹게 그들과 주고받으며 이루어진 교감적인 것이었다. 창녀와 세리 곧 그 시대의 죄인들이 앞장 선 예수운동은 그렇게 일어난 것이었다. 그분을 통해 발견한 하느님나라가 그들 안에 심어지자 그들은 하느님나라를 살았고 하느님나라에 들어갔다. 그들과 그분이 그렇게 한 마음 한 몸이 되면서 그분의 이름 그 자체에서도 구원을 향한 자유와 해방의 권능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분께서 지상의 삶을 마감하신 후에도 오직 그분의 이름만 드러낼지라도 기적들이 이루어지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사도행전 곳곳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듯이, 사도들이 선교하지 않은 곳에서도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가 행해지고, 아예 몇몇 유다인들은 구마에 효능 있다는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려다 혼쭐이 나기도 한다(사도 19,13). 그만큼 그 시대에 그분에 대한 사랑의 기억들이 성령의 불길처럼 그들 속에 활활 타오르며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기억의 창고에 가득 고여 있는 ‘해방과 자유의 전갈(傳喝)’로서의 그분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져 기적의 씨앗을 고스란히 발아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무슨 초능력이나 부적효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담겨져 있는 빛바랜 추억의 잔영이 낳은 사랑의 불씨 그 발화였던 것이다. 사랑이 사랑을 부르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 그분 구원사업은 그렇게 번져나가고 인류구원의 여정 그 길을 밟아나가고 있다. 

교회도 세상도 그분과 한 몸 되어

교회! 그분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세우신 교회는 그 구원이 이루어지고 난 후, 참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1코린 13,8) 어떤 모습으로 인류에게 기억될 것인가. 한국천주교회 역시 한국사회 안에서 위상이 높아지면서 전체 신자 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영적 생명력이 없는 교회에 ‘믿고 살’ 맛을 잃은 신자들은 곧바로 냉담자로 되면서 교회에서 멀어져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앞에서 벌어 뒤로 잃는 꼴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펴낸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08>에 따르면 2008년 말 현재 전체 신자 수는 5백만 4115명으로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된 225년 만에 처음으로 5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민 총 인구대비 9.9%로 10명 중 1명이 신자인 셈이다. 하지만 그 통계자료에 의하면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여율은 25%에도 못 미친다고 나타나니 결국 신자 대다수가 이른바 냉담자라는 사실만 반증해주면서, 역설적으로 복음화율 10%의 500만 명이 허장성세의 허수일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야말로 오히려 교회의 신원과 정체성을 재정립하고서 참된 복음화를 향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자기성찰과 내적 쇄신을 향한 전환기로 삼아야 할 중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참된 복음화는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을 향한 조문행렬에 현혹되어 그분의 상품화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사목지침으로 삼았던 그분의 삶을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나자렛 사람 예수의 이름’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권능을 부여해준 그분의 삶을 교회가 몸소 따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처럼 세상의 교회에 대한 기억의 창고 속에 사랑이 가득 고여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분의 이름처럼 교회의 이름 자체가 세상 안에 사랑의 권능을 지닐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권능은 사랑의 권능이어야 할 것이며 교회의 권위 역시 사랑의 권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기억 창고에 저장되어진 사랑들이 일깨워지고 온전히 살아날 때 비로소 교회는 ‘해방과 자유의 전갈’인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시키는 생명의 힘이 되리라.

교회의 길은 하느님의 길인 동시에 인간의 길이다. “이 땅과 하느님을 아울러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믿을 수 있다.”는 본회퍼의 절규는 교회에도 합당하기만 하다. 교회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명과 마음을 잃어 잊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니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이루려는 간절한 몸짓을 드러낼 때, 교회와 세상도 그분과 그들처럼 한 마음 한 몸이 될 것이다. 세상이 언제까지나 나자렛 사람 예수의 이름에, 아니 교회의 이름에 희망을 걸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그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기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정중규/ 장애인운동가, 다음 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지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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