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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하게 펼쳐진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아
카테고리 : 지금여기 칼럼 | 조회수 : 22952010-02-15 오후 6:20:00

장엄하게 펼쳐진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아

 

[정중규 칼럼]

 

2010년 02월 15일 (월) 정중규 mugeoul@hanmail.net

 

 

   
▲ 사진/고동주

설 명절을 맞아 부산으로 내려와 해운대 바닷가에 오니 탁 트인 수평선만큼이나 늦겨울 바다가 환상적이다. 떼야르 드 샤르댕의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가 떠오르는 장엄한 풍경이다.

주님, 이번에는 앤(Aisne) 숲 속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 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불이 찬란한 빛을 내며 떠오르면, 그 아래 살아 있는 땅의 표면은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며 또다시 그 두려운 노동을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저는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 낼 소출들을 저의 이 성반(聖盤)에 담겠습니다. 또 오늘 하루 이 땅이 산출해 낼 열매들에서 짜낼 액즙을 이 성작(聖爵)에 담겠습니다. 이제 곧 지구 곳곳으로부터 올라와 ‘영(靈)’을 향해 모아질 온갖 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영혼의 깊은 속, 그것이 저의 성반이며 성작입니다. 새날을 맞이하라고 지금 빛이 흔들어 깨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과 신비로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주님, 새날의 첫 새벽에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계 전체가, 당신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다 올려 봉헌하는 이 거대한 제병(祭餠)을 받으소서. 저희의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느낌으로 감지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저희는 모두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제가 비록 당신의 성인들처럼 영적 열망을 지니지도 그분들 같이 드높은 순결에 이르지도 못했지만, 당신께서는 저에게 칙칙한 물질 덩어리 속에서 꿈틀대는 모든 것들을 향해 억누를 길 없는 애정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천국의 자녀이기보다는, 비교 할 수 없이 더, 땅의 아들임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아침 제 어머니의 희망과 비참을 가슴에 품고 마음속으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렵니다. 거기서 당신께서 제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사제품의 힘을 빌어 저는 떠오르는 태양 아래 인간 육체의 세계에서 이제 곧 태어날 것과 죽어 갈 것을 위해 ‘불’을 끌어내리겠습니다.

고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그가 탐사를 위해 오르도스 사막에 가게 되어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떠올라 쓴 묵상글이다. 마침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이었던 그날 예수회 사제이자 신비가였던 떼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그리스도의 성체적(聖體的) 현존은 온 우주에까지 미치고, 궁극적으로 물질 전체가 서서히 대축성(大祝聖)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 사진/고동주


근본과 깊음을 잃어 야단법석으로 되어가는 강신제(降神祭)

입춘이 지났지만 겨울은 제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저어하듯 산자락에는 잔설(殘雪)이, 하늘도 잿빛 눈구름이 무겁기만 하다. 그럴지라도 얇디얇은 햇살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이미 봄날 같은 한낮이다. 삭막한 겨울풍경인데도 오르막길 옆 도랑의 얼음장마저 살짝 찢어지면서 시냇물로 사르르 녹아 흐르니, 단 하루 영상기온을 되찾았을 뿐인데도 만물을 생동감 있게 풀어놓는 대지의 넉넉함이 참 좋다. 용케도 좋은 날씨를 아는 것은 새와 같은 미물들이니, 금방 땅 위로 내려와 꽁지깃 틀며 걸음걸이 뽐내고 울음소리 역시 한껏 청아해진다.

떼야르 드 샤르댕은 다시 말한다. “그분 안에서 가장 살아있고 가장 육화 되어있는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고 있는 이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행동의 매순간, 순간적인 노동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그분이 내 펜의 끝, 내 삽, 내 바늘의 끝에 계시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한 획을, 한 줄을, 한 땀을 열심히 뜨면서 마지막 완성까지 계속한다면, 나의 가장 깊은 의지가 향하는 그 마지막 지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현대에 와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함은, 아니 현대인이 하느님의 모습을 잘 볼 수 없음은 오도된 강신제(降神祭) 때문일 것이다. 밤하늘의 별빛을 고요히 응시할지라도 그분은 한없이 깊게 찾아오시는데, 현대인들은 바알의 예언자들처럼 야단법석을 부려야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양 하니, 모든 걸 볼 수 있다지만 사실로는 까막눈인 현대의 희극적 비극 상황을 낳는 원인이다. 근본과 깊음을 잃어버렸기에 참된 침묵을 모르는 현대문명의 비극을 예감했던 사상가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의 “침묵하라! 오직 침묵하라!”는 호소는 차라리 예언이었을까!

 

   
▲ 사진/고동주

사랑은 우리를 연대성으로 초대한다

대림절, 신정, 설날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새해인사를 나누었지만 다시금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새해맞이를 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청동을 거울로 삼으면 의관을 바르게 하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볼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고 했던가!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근본에 바로 서는 통찰력을 지닐 수 있기를, 모든 것이 비인간화와 물질주의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가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로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특히 수십 년 키워온 구조악이 모든 것을 뿌리 채 흔들고 있는 이 부조리한 현실에서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 자기권리를 지켜내는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는 더욱 절실하다. 그럴 때 지난 1979년에 열렸던 푸에블라 중남미주교회의에서 칠레 주교단이 발표한 “그리스도의 계명은 먼저 자비로 불리었고, 그 다음으로는 사랑으로, 그 다음으로는 참여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연대성으로 불린다.”는 내용의 성명서는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지 않은가.

자비는, 사랑은 우리를 연대성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내 스스로와 우리 각자가 깨어나고, 시민의식과 공동체의식이 깨어나고 교회와 예언적 혼이 깨어나야 한다. 깨어난다는 것은 새롭게 된다는 것, 모든 구원의 지름길은 결국 쇄신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정중규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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