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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예수라는 남편과 살아가는 시집살이 (롬 7:4-6)
카테고리 : ╁'성경강해 | 조회수 : 112021-04-09 오후 2:49:00

 -.예수라는 남편과 살아가는 시집살이 (롬 7:4-6).-

-.정낙원 목사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담 안은 법이 지배해요.

그래서 우리는 출생과 동시에 율법으로 정죄당하면서 살았어요.

율법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죽음에 가두고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쫓기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은혜 아래로 옮겨 주셨습니다.

은혜란? 죄를 사해주고 허물을 덮어주어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정죄당하지 않고 쉼을 얻고 살게 됩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이 우리를 법 아래서 은혜 안으로 옮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여자가 남편에게 시집오는 것으로 비유하여 말해 주었습니다.

성도는 율법이라는 옛 남편에게서 예수라는 새 남편에게 시집을 온 아내라고 합니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성도의 구원을 혼인 이야기로 비유하여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여자가 남편에게 시집을 가는 혼인 속에는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남녀 간의 혼인 이야기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를 말해주는 예표(豫表)가 되는 겁니다.

광의적으로 보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은물과 같아요.

이는 만물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1장에서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담겨져 있다고 했어요.

그러므로 인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들 속에는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계시사적인 민족이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 속에는 계시적인 의미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구약의 성경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열면 아담과 하와의 혼인이야기로 시작하여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성경을 닫습니다.

시작과 끝이 혼인이야기로 되어 있어요.

시작과 끝이 혼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곧 그 중간에 있는 모든 것도 혼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서론(序論)과 결론(結論)이 혼인이야기라고 한다면 본론(本論) 역시 혼인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혼인 이야기 속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남녀 간에 혼인 이야기 속에는 복음에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잖아요.

성도가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진 것을 혼인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잖아요.

그러니 여자가 남편에게 시집오는 것을 복음적으로 풀어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왔으니 “하나님에 대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말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 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으란 말입니다.

옛 언약으로 살지 말고 새 언약으로 살라는 말이에요.

이는 곧 성도의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율법 아래 있을 때를 육(肉)이라고 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영(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는 말은 거듭난 자로서 살라는 말이에요.

이를 영 안에서 섬기라고 합니다.

 

영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에요.

육이 율법이라고 한다면 영은 예수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율법(육) 아래 있지 않고, 은혜(영) 아래 있어요.

옛 언약(육)에 속하지 않고, 새 언약(영)에 속하였어요.

율법(육)이라는 남편에게서, 예수(영)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왔어요.

 

그러니 새 남편(영)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으라는 것입니다.

새 남편이 정해준 법(새 언약)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이걸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것을 여자가 남편에게 시집을 와서 시집살이 하는 것으로 비유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시집을 온다는 것은 친정을 떠나오는 것입니다.

친정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우린 율법 아래 태어났어요.

율법을 육이라고 했지요.

그럼 우리의 친정집은 육에 속한 곳이고, 시집은 영에 속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는 거에요.

 

이걸 아브라함 식으로 말하면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과 같아요.

말이 떠나는 것이지 옛 사람을 죽이는 거에요.

그러니 여자가 시집을 오면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옛 사람에게 속한 것은 버리고 새 사람에게 속한 것은 취하여야 합니다.

 

여자는 시집을 오면서 친정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남편의 삶으로 귀속이 되어요.

그러니까 친정에서 살던 방식으로 살면 안 되어요.

이젠 시집에서 사는 방식으로 살아야 해요.

이게 시집살이에요.

 

시집을 오면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므로 여자가 시집을 오게 되면 반드시 버릴 것과 취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친정에서의 것은 버리고 시집에 것은 취하여야 합니다.

친정에 법도도 버려야 하지만 친정에서 살던 습성이나 방식도 버려야 합니다.

시집에는 시집의 법도가 있고 시집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정이 어디인가요?

아담이에요.

아담이라는 친정에서의 법도는 율법이에요.

우리는 아담이라는 친정에서는 법으로 살았어요.

자기 행실로 인하여 옳으냐 그르냐로 정죄당하고 살았어요.

 

이렇게 정죄당하고 살던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법 아래서 늘 정죄 당하였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선악의 법이 있어요.

 

율법 아래서의 선과 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로 판단해요.

율법이라는 친정집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 라는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판단을 받았어요.

율법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 불순종을 악이라고 해요.

 

예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서 늘 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를 추궁 당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율법 아래서 본능적으로 율법이 정한 선(善)과 의(義)라는 것으로 판단을 받고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 당하였어요.

또한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살고자 했어요.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선한 자이고 의롭다 여김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린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서의 신앙생활은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어요.

왜냐하면! 눈만 뜨면 내가 뭘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좋아서 지킨 것이 아니고 안 지키면 악이라고 추궁을 당하니까 지킨 겁니다.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 사랑을 하였어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척 하였어요.

이걸 제사라고 합니다.

 

제사는 지내는데 정작 그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할 감사함은 없었던 겁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니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어요.

이걸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이란? 연기(演技)하는 거에요.

우리는 율법 아래서는 기술적으로 연기(演技)를 했어요.

 

마음에도 없는 충성을 하였고!

마음에도 없는 봉사를 하였고!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했어요.

하나님이 좋아서 사랑한 것이 아니고 사랑 안하면 죽인다고 하니까 억지 춘향으로 한 거에요.

 

결국 우리는 외식이라는 그 짐에 눌려서 탄식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건 죽는 것이에요.

결국 우리는 율법 아래서 죽은 자로서 산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동네는 죽음이 왕 노릇해요.

거긴 생명이 없어요.

그러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다 죽은 자에요.

율법은 죽음의 동네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 아래서 우리를 빼내 주셨어요.

어떻게 빼내 주셨는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들어 주시고 빼내 주셨어요.

율법의 요구가 뭔가요?죽음이에요.

 

율법은 우리를 죽이고자 주어진 것이에요.

그러니 율법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담당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를 자기 아내로 맞이해 주었어요.

그러면서 알려 줍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더러 이제는 율법의 요구를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 놈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 놈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면 내 피를 내어 보이라고 합니다.

이게 새로운 남편 안에서 영으로 사는 거에요.

 

우린 재혼한 여자들입니다.

우리는 두 남편이 있어요.

옛 남편과 새 남편이에요.

 

이 두 남편은 달라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천국과 지옥처럼 달라요.

율법이라는 남편은 죽이는 남편이고, 예수라는 남편은 살리는 남편이에요.

율법이라는 남편은 인정머리가 파리똥만큼도 없고, 예수라는 남편은 인정이 하늘만큼 땅만큼 많아요.

 

율법이라는 옛 남편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했어요.

늘 우리 행실을 가지고 닦달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율법이라는 남편과는 지옥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남편은 우리를 닦달하지 않아요.

우리의 허물을 다 덮어 주십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자신이 다 감싸 안고 용서해 주세요.

예수라는 남편과는 천국으로 살아요.

 

우리는 예수라는 남편을 통해서 율법이라는 남편이 아주 못된 남편임을 알게 되었어요.

반면에 율법이라는 아주 고약한 남편 때문에 예수라는 남편이 너무도 좋은 남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라는 아주 좋은 남편을 알게 하려고 그 고약한 율법이라는 못된 남편에게 먼저 시집살이를 시키신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알게 하려고 법 아래 가두어 두었던 겁니다.

영생을 알게 하시려고 죽음에 가두어 놓으시고!

천국을 알려 주시려고 지옥에 던져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죄 아래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가두어 놓으시고 죽음으로 살게 하신 것은 모두가 다 은혜를 알게 하고, 영생을 알게 하고, 천국을 알게 하려는 수순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에서 빠져 나와서 은혜 아래서 영생으로 천국을 누리면서 우리는 예수라는 신랑에 고마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우리를 구해 주신 그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

우리가 엄청난 사랑을 입었구나!

예수라는 신랑이 너무도 귀한 분임을 알게 되어요.

그리고 그 신랑의 은혜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시집살이에요.

 

천사들은 이러한 성도들의 구원을 너무도 부러워해요.

그래서 흠모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천사들을 부러워하고 있어요.

 

우리가 얼마나 바보인줄 아세요.

천사들은 우리를 부러워하는데 우리는 도리어 천사들을 부러워하고 있으니 얼마나 등신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너희가 천사보다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제발 철이 좀 들라고!

 

우리는 예수라는 남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아가야 합니다.

더 깊이!

더 많이!

더 높이!

더 길게!

알아가야 해요.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왔으니 예수라는 남편이 어떤 분인지 많이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남편의 사랑에 압도당하여야 해요.

남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여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으로 말이에요.

 

시집을 온 여자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은 남편의 가문에 법도를 익히는 것이에요.

일하는 것이 아니에요.

남편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에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합니다.

 

4절을 봅시다.

 

4절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니 이제는 우리로 살게 하신 이 곧 예수그리스도로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라는 신랑이 내 주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라는 남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다가 죽었어요.

죽음으로서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아내로 살던 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이 나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가 없어요.

 

이제 우리 신랑은 예수에요.

그럼 우리는 예수라는 신랑의 말만 들어야 해요.

예수라는 신랑의 말을 듣고 시아버지인 하나님을 섬겨야 해요.

이걸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사랑을 들고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법으로 나아가지 말고 은혜로 나아가라는 말이에요.

 

율법은 죄의 왕이에요.

율법은 죄인을 다스려요.

율법은 죄 아래 있는 자들에게만 힘을 써요.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율법은 죄인을 죽이는 일을 해요.

죽은 자에게 율법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해요.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죽음으로서 죄의 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죄로부터 벗어났어요.

어째서 그런가요?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요.

그러므로 죽으면 죄값을 다 치른 것이 되어요.

 

율법이 너 죽을래!

우리를 닦달을 하니까!

예수님이 우리는 안고 십자가에서 콱~ 죽여 버렸어요.

율법이 깜짝 놀라는 거에요.

율법이 어! 어~ 하면서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만 겁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율법으로부터 정죄를 당하지 않아요.

죄 값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었으니 더 이상 법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에 의해서 말이에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이란? 한번 확정이 된 판결은 또 다시 다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우린 그 죄값으로 죽었잖아요.

이걸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는 죄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이 아니고 죄로 인하여 정죄를 받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는 우리는 법에 동네 사람이 아니고, 은혜라는 동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같이 죽었어요.

그리고 예수와 함께 살아났어요.

이젠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걸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해요.

 

아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아는 것이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그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에요.

그럼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정죄가 없겠지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율법에 요구를 다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의 삯인 사망이라는 값을 치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죽을 때 예수 안에 있는 자들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아담 안에 있는 자와 예수 안에 있는 자로 구분을 해요.

아담 안에서 있는 자는 아담이 일괄처리를 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일괄처리 하세요.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함께 죽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니 율법으로 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무 율법주의로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율법으로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율법에 사람으로 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라고 합니다.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은혜로 사는 것을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 고 합니다.

 

6절을 보세요.

 

6절 “율법에서 벗어났으므로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말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

 

무슨 말인가요?

예수에게 시집을 왔으면 더 이상 율법으로 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아내로 살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옛날 방식으로 살지 말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라는 말이에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는 말은 새로운 남편의 법도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새로운 남편의 법도가 뭔가요?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방식으로 섬기란 말입니다.

 

이제는 사는 방식이 달라졌어요.

예수 안에서 사는 방식은 예수님이 우리 행실을 책임져 주는 방식이에요.

예수 안에서는 우리가 책임질 것이 없어요.

우리 인생을 우리의 남편이신 예수님이 책임을 지세요.

 

옛날 율법이라는 남편 아래서는 내가 내 행실에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살았어요.

그러나 예수라는 남편 아래서는 예수님이 내 행실을 책임져 주는 방식으로 살게 되어요.

그러니 우리는 비록 육신으로 죄 가운데 살고 있어도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걸 은혜로 산다고 해요.

 

여자가 남편에게 시집을 오면 새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성(姓)이 바뀌어요.

 

하나님은 이걸 이름을 바꿔주는 것으로 말해주었어요.

이건 땅 사람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여자가 시집을 오게 되면 친정 아버지가 주신 성(姓)을 버리고 남편의 성(姓)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아담의 성(姓)이 아니고 예수라는 성(姓)을 받았어요.

 

우리의 친정 아버지가 누구인가요?

아담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시집을 오면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는 죽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아담 안에서 받은 성(姓)을 버리고 예수라는 남편의 성(姓)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성도의 이름이 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바뀌어요.

이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산에 구원 받은 성도 144000명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이마에 모두 어린양의 이름이 써 있어요.

자기 이름은 없고 모두가 어린 양의 이름이에요.

자기 이름이 없다는 말은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고 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을 원리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새 언약의 원리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관념이에요.

새 언약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거에요.

 

성경에서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고 하지요.

 

이 말이 쉬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믿으라는 말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믿으라는 말의 바탕엔 믿을 수 없음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으라고 하는 거에요.

 

믿어지면 믿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쉬운 말로 참 기름이면 그냥 참 기름이라고 하면 되는데 진짜 참기름 이라고 하잖아요.

왜? 참 기름 앞에 “진짜” 라는 말을 씁니까?

가짜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진짜 라는 말을 쓸 때는 이미 가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겁니다.

 

믿으라는 말도 이와 같아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모순처럼 들리지요.

믿을 수 없으면 못 믿는 것이지 어떻게 믿습니까?

 

그래서 믿음이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이게 믿어져요.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인데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세요! 라는 말은 이성적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율법 아래서는 믿으라는 것이 없어요.

그냥 행하면 되기 때문이에요.

행함에선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행함의 반대로서 주어지는 말씀인 겁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우리 행함을 믿지 말라는 거에요.

우리 꼬라지 보지 말라는 겁니다.

 

내 꼬라지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한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내 꼬라지가 죄인이 아니면 예수를 믿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그냥 의로운 자로 살면 되어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우린 여전히 죄의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행실을 보지 말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말은 우리의 죄와 불신을 바탕으로 주어지는 말씀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믿을 수 없는 환경으로 밀어 넣고 믿으라고 해요.

여기에 육에 속한 사람은 다 넘어져요.

영은 믿음으로 판단하고 육은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가 갈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이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을 믿어지게 하기 위함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로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자는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는 것을 절대로 믿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는 것은 우리더러 믿게 하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을 찾아내고자 함이에요.

이걸 자기 백성 찾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냈어요.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너희들은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예수를 하나님 대하듯이 대 하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은 인간적으로 지극히 정상이에요.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는 자들이 비정상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져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셨어요.

그러니 믿음을 받은 자들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새 언약도 이와 같아요.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우리의 행실로 인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이 말이 성립이 되려면 우리가 정죄 받아야 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정죄 받아야 하는데!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은 믿는 것이지 우리가 뭘 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의 피로 의롭게 되었음을 믿는 것이지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의롭다 함을 입은 자에요.

그러니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이 없이 우린 의로운 자인 것입니다.

이걸 믿으라는 거에요.

 

믿음으로 살라는 말은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다 이루신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으란 말이에요.

 

다시 말합니다.

율법이라는 신랑과 살 때는 믿음이 필요가 없었어요.

거기선 내가 다 행하였기 때문이에요.

율법이라는 신랑은 행하라고 하지 믿으라고 하지 않아요.

자기는 가만있고 우리보고 행하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율법이라는 신랑과 살 때는 열심히 행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신랑에게 오니 행하려고 하지 말고 믿으라고 합니다.

우리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예수가 다 책임을 져 준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너 그저 가만히 있어!

다 나가 해 줄게!

내 품에 둥지를 틀어!

그런단 말이에요.

 

예수라는 신랑이 다 알아서 할 테니! 믿으라는 거에요.

이건 율법 아래서는 없던 거에요.

율법 아래서는 이러한 것을 몰라요.

믿음이라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동네에서 살았어요.

행함이라는 동네에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믿음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왔어요.

믿음이라는 동네는 율법이라는 동네하고는 전부 다 달라요.

그러니 전부 낯설어요.

 

우리는 행함이라는 동네에서 잔뼈가 굵어서 습관화 되어 있어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동네에 와서 살면서도 옛날 행함이라는 동네에서 살던 습성들이 툭툭 튀어 나와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동네에서 행함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자꾸만 행함으로 살라고 미혹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마귀에게 미혹당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넌 이제 내 아내이니까 율법이라는 옛 남편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내 꼬라지를 보지 말아야 해요.

비록 우리 꼬라지가 여전히 옛 꼬라지이지만!

믿음으로 아니야~ 난 새 사람이야!

내 신랑은 예수야!

난 더 이상 율법으로 정죄당하지 않아!

우리 신랑 예수가 우리가 받을 정죄를 다 받았어!

난 죄에 대해서 죽었어! 라고 살으란 말입니다.

 

비록 내 꼬라지가 죄인이지만 나는 이제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난 자유자! 라는 것을 믿음으로 살으란 말이에요.

이것을 의문에 묵은 것으로 살지 않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묵시로서 역사로 살아낸다고 해요.

 

묵시로 역사를 산다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게 또 어려운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아담 안에서 난 자는 역사에 속하였어요.

그러므로 우리 몸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여전히 옛 몸 그대로 죄 아래서 살고 있어요.

 

역사란? 죄 아래 있어요.

우리 몸은 예수를 믿어도 역사에 속하여 살고 있어요.

예수가 우리를 안고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예수님 혼자 하신 일이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함께 동참해서 경험을 한 일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어요.

하지만 우리는 가만히 있고 예수님 혼자서만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우리가 한 것으로 믿으라고 해요.

우리도 예수와 함께 한 것으로 믿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주신 겁니다.

 

그럼 우리는 그 믿음으로 실제 삶으로 풀어내야 하는 거에요.

실제로는 내가 죄를 짓고 살지만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라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믿어지게 하시는 일을 우리 안에서 하시는 거에요.

 

우리의 몸뚱이는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변한 것이 없어요.

우린 여전히 죄 아래서 살고 있어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육신은 죄를 안 짓고는 살 수가 없어요.

 

우린 마치 죄라는 탄광촌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탄광촌에 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옷이나 몸에 연탄이 묻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이러한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공격을 해요.

우리에게 묻은 죄라는 연탄을 보고 너 죄 지었지!

그런단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연탄 묻어도 너희들을 탓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살라고 합니다.

예수가 그 책임을 다 지니까 안심하라는 겁니다.

믿음을 주어서 우리의 모습을 보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게 하십니다.

이게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사는 거에요.

 

성도는 묵시에 속한 자들이에요.

비록 몸뚱이는 역사에 살고 있지만 적용은 묵시적 원리로 적용을 받아요.

그러므로 우리의 행실도 묵시적 가치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새 언약 속에는 우리 행실로 인한 정죄함이 없어요.

그러므로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면 율법에 의하여 정죄당하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묵시적 원리가 뭔가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대하세요.

새 언약은 묵시에 속한 언약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역사 속에서 묵시적 가치로 대함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옛 사람이 아니고 새 사람으로 대해 주세요.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율법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은혜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도 율법으로 판단 받지 않고 은혜로 판단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성도는 그 어떤 행실로도 정죄 받지 않아요.

여기서 정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지옥을 보내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야할 지옥을 예수님이 대신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또 오해할까봐서 못을 하나 쳐 놓고 갑니다.

 

이러면 꼭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래서 실제로 막 사는 인간들이 있어요.

이건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는 율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는 죄와 싸우는 자들이에요.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하는 자들이에요.

땅에 지체를 죽이는 자들이에요.

우리 몸은 막 살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막 살지 않고자 하는 지향성(指向性)을 띠고 살아가게 된단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자기의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에게 구습을 벗어 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땅에 지체를 죽이라고 하는 거에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이런 소원을 두고서 우리를 간섭하세요.

 

구습이니,

땅에 지체니,

세상을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 옛 사람으로서 아담이라는 친정에서 살던 것들이에요.

아담 안에서 살던 것들이에요.

 

그러나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전에는 세상 것을 쫓아서 살았지만 이제는 세상 적인 가치관으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이젠 하늘에 사람으로 되었으니 하늘에 가치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세상 것을 좇아가고자 하는 자기 꼬라지로 인하여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겠지요.

이 싸움은 평생 하여야 해요.

죄 아래 있지만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자 싸우는 겁니다.

이게 날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는 것이에요.

 

물론 이 싸움에서 우리는 늘 집니다.

우리 육신은 성령의 소욕 보다 육신의 소욕이 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 할지라도 죄에 넘어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죄 당하진 않아요.

 

그러니 우리는 넘어지면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은혜에 감사케 되어요.

죄를 지으면서도 정죄당하지 않는 그 은혜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위하여 피 흘려주신 예수라는 신랑의 고마움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마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하나님은 세상에 사람들을 두 부류로 대하세요.

법으로 대하는 자와,

은혜로 대하는 자가 있어요.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법으로 대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은혜로 대하세요.

 

은혜로 대하신다는 말은 더 이상 법으로 정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육신으로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지어도 더 이상 그 육신의 행위를 가지고 정죄 당하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게 믿음을 받으면 믿어지는데 믿음을 안 받으면 믿어지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겠는데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아요.

자기 안에 양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법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누가 잘못을 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하면서 법을 들이 대는 겁니다.

이는 스스로가 법에 속하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에요.

 

정죄 당하지 않음이 되려면 역설적으로 여전히 죄가 있어야 하겠지요.

죄가 있어야 정죄당하지 않음이 성립이 되잖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쉽게 말합니다.

빛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둠을 필요로 해요.

어둠은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법을 동원해요.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불의를 동원해요.

용서를 위해서 범죄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걸 또 오해하면 안 되어요.

 

야~!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범죄하자!

그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의 몸은 죄 짓지 않아야지 하여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어요.

우린 이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한계성을 알기 위해서 죄를 안 짓고자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우리는 죄를 안 짓고자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죄를 안 짓고자 하는 것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절감 하여야 해요.

이러할 때 용서가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을 은혜로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 곁에 정죄 당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당연히 정죄 당하였을 터인데도, 이제는 정죄 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옛날 같으면 우리 안에서 율법이 참소를 하여서 마음이 지옥이었는데!

지금은 우리 안에서 은혜가 이 율법의 참소를 다 막아 주어요.

그래서 정죄당하여야 하는 데서도 정죄함 없이 은혜로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새 남편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에요.

 

우리는 비록 예수라는 신랑과 살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죄에 노출이 되어 있어요.

죄를 짓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라는 신랑이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는 겁니다.

이걸 바울은 그가 우리를 진노하심에서 건지셨으므로 더욱 더 은혜로 대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신랑이 우리를 은혜로 감싸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몸의 행실로 인하여 법으로 정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랑이 법에 속한 분이 아니고 은혜에 속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랑은 우리를 법으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하세요.

그러니 우리도 은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율법이라는 남편 아래서 살았어요.

그 습성이 남아 있어요.

이건 마치 시집을 온 여자가 비록 시집을 왔다고 하지만 여전히 친정에서 배운 것이 습성으로 남아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친정에서 살던 방식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것과 같아요.

 

이 습성을 버리라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던 습성을 버리라는 거에요.

자기를 법으로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신앙생활은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시집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성도의 시집살이가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시집살이란? 시집의 법도(法道)로 사는 것을 말해요.

친정에서 사는 법도가 있듯이 시집에도 사는 법도가 있어요.

 

친정에서는 법으로 살았어요.

그러나 시집은 은혜로 살아요.

친정에서 법으로 적용 받았지만, 시집에서는 은혜로 적용을 받아요.

 

그럼 시집을 온 여자는 빨리 시집의 법도를 익혀야지요.

시집의 풍습과 분위기에 빨리 동화 되어야 해요.

그러므로 시집을 온 여자는 시집을 오는 순간부터 친정에서의 삶에 방식을 버리고 시집의 삶에 방식을 배우고 익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집을 오면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집니다.

그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야 합니다.

가까이는 남편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시부모와 시 형제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 가족들이란 바로 교회 안에 한 형제들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우리의 시집이에요.

그러므로 교회 안에 형제들을 법으로 대하지 말고 은혜로 대하여야 해요.

세상 가치로 대하지 말고 예수의 피로 용서 받은 한 형제로 대하여야 해요.

 

교회에서의 생활은 시집살이 하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으로 모든 성도들을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1장부터 11장까지는 원리적인 것을 말해주고 있고, 12장에서부터는 그 원리를 실제로 살아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신나는 이야기에요.

원리와 실제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특히 5,6,7,8장은 그 원리의 핵(核)이에요.

가슴을 황홀하게 하는 말씀들이에요.

그럼 우리는 이 원리를 실제로 살아야 해요.

그럼 예수 믿는 것이 신이 나고 감사하고 배짱이 생겨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원리는 아는데 그 원리를 실제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로마서의 신앙이 관념으로만 흐르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주는 자유를 실제 삶 속에서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그 맛을 실제로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실제 삶 속에서 누리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밥상을 차려 놓았으면 우리는 그 밥을 먹고 살아야 해요.

 

예수님은 우리 앞에 밥상을 차려 놓은 것은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고 먹으라고 차려 놓았어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이 차려 놓은 밥상에 밥을 먹어야 하는 거에요.

밥을 먹고 힘을 얻어서 그 밥에 힘으로 살아야지요.

그 밥에 힘으로 사는 것이 영으로 살고 섬기는 것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영이란? 새 사람이란 말이에요.

법에 사람이 아니고 은혜의 사람을 말해요.

그러니 영으로 섬기란 말은 은혜의 새 사람 답게 은혜로 살으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도 은혜로 나아오고 형제들에게도 은혜로 대하라는 말이에요.

신앙생활을 법으로 하지 말고 은혜로 하란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법 아래 있던 우리는 은혜 아래로 옮겨 주셨잖아요.

그럼 은혜로 살아야지요.

은혜 아래 옮겨 주셨는데도 법으로 살면 예수님이 헛 짓을 하고 만 것이 되잖아요.

 

그러니 우리 신랑인 예수님이 피 흘려서 하신 일을 헛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으로 살아야 하겠지요.

그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더 이상 옛날 남편인 율법에게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살 때 예수라는 남편이 기뻐하세요.

 

예수를 믿으면서도 우린 무수히 죄를 짓고 살아요.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지 못해요.

 

흔히 그러잖아요.

예수 믿는 것들이 왜? 그래 하잖아요.

제 아내는 저에게 툭 하면 목사가 왜? 그래 라고 해요.

 

예수 믿는 것들이 왜? 그래!

목사가 왜? 그래! 라는 말 속에는 자기들이 정해 놓은 규범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정한 규범에 어긋나니까

성도가 왜? 그래!

목사가 왜? 그래! 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래! 라고 정한 규범이 율법이에요.

그럼 누가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율법적으로 뭐라고 하면 사람에겐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마귀의 참소로부터는 끄떡하지 말아야 해요.

사람에겐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마귀의 참소 앞에서는 당당하게 예수의 피로 물리쳐야 해요.

 

이걸 분간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서 잠시 터치하고 갑시다.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니까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족도 돌보지 않고 가정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죄인인데 하면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안하고 신앙을 핑계로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장으로서 할 일을 안 하고!

또는 아내로서 할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회 안에서는 장로는 장로로서 할 일이 있고!

집사는 집사로서 할 일이 있는데도 방기하는 겁니다.

그것도 복음을 핑계대면서 말이에요.

 

이건 그런게 아니에요.

우리가 정죄당하지 않는 것은 마귀로부터의 자유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에요.

 

사람에게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들에겐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있어요.

그 도리를 지키고 사세요.

남에게 욕먹지 말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규범이 있어요.

그 규범으로 신자를 판단해요.

그리곤 우리의 잘못을 가지고 우리를 욕하지 않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욕해요.

예수를 욕한단 말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를 개독교 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판단 기준에 교회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의 판단은 하나님 앞에서 틀린 거에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그들과 함께 몸 담고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에요.

 

바울이 그러지요.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有益)된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이는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 신앙에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유를 자기 사욕으로 쓰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 것이 아니고 남에 것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남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내 맘대로 살지 말고 사회의 규범대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천국 백성이에요.

천국백성이지만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 백성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란 말입니다.

 

천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삶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 가치로 살지만 우리는 영적 가치로 살아야 해요.

영적 가치로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름으로 사는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들이 우(右)하면 나는 좌(左)하고!

그들이 좌(左)하면 나는 우(右)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라고 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난 예수 믿기 때문에 괜찮아!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물론 예수 안에서는 괜찮아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겐 괜찮지 않아요.

 

그들은 그들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정해 놓은 죄가 있어요.

성도는 그 죄관으로 판단 받지 않아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정한 죄를 피하여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쉬운 말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교인들은 술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운다고 생각을 해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일 날이면 반드시 교회에 가는 것으로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술을 먹지 말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좋은 겁니다.

주일에 놀러 다니지 말고 교회에 가는 게 좋은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다름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히 술이 먹고 싶고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혼자 먹고 피우세요.

정히 놀러 다니고 싶으면 주일이 아닌 다른 날에 다니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분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의 행동을 가지고 하나님을 욕한단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욕을 당한다고!

제발 하나님 욕 먹이지 마세요.

 

바울을 보세요.

자신은 우상이 없어요.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도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고기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먹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부정하다고 생각을 해서 고기 먹는 것을 우상숭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있어요.

만약에 자신이 고기를 먹는 것 때문에 누가 시험에 든다고 하면 자기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런 것으로 연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이게 진정한 자유자에요.

형제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자유가 복음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에요.

난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내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복음으로 자유한 자에요.

 

바울은 난 아무렇지 않지만 그 사람에겐 내가 내 자유함으로 맘대로 고기 먹는 것이 시험에 들 수가 있다고 한다면 비록 나는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유를 나를 위해 쓰지 않고 그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고기를 안 먹는 것으로 쓴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우리의 양심을 우리 것이 아니고 타인의 것이라고 했어요.

즉 내 맘대로 살지 말고 남에 눈을 의식하고 살으란 말입니다.

이게 진정한 자유자에요.

 

내 맘대로 할 수가 있다고 하여서 육신이 이끄는 대로 맘 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에요.

그건 방종이고 방탕이이에요.

그건 복음을 자기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악용하는 거에요.

그러니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내 맘대로 살지 말고 도리어 내 맘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세요.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의 행동으로 인하여 이방인들에게 모독을 당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남에게 욕 먹지 않도록 잘 하고 사세요.

이게 신자의 모습이에요.

 

남편이나 아내에게 잘 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세요.

당당하지 말고!

당당한 것은 마귀에게 하고!

사람에겐 제발 미안한 맘으로 사세요.

배우자에게 나 같은 인간하고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하세요.

 

성도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해요.

그러므로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받아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이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세상의 악을 고발하는 형식으로 나타나요.

이게 또 어려운데!

 

베드로전서 4장을 봅시다.

 

벧전 4:1-6=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이방인의 뜻을 좇아서 산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하지요.

“족하다” 는 말은 이제 그만하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이젠 다른 동네로 이사 왔으니 그만 하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옛 사람의 삶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삶을 한마디로 하면 자기 정욕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죄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남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죄의 성향입니다.

죄는 자기 밖에 몰라요.

이렇게 자기 밖에 모르는 것을 한마디로 정욕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도록 간섭을 받아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간섭하세요.

야! 옛날에는 너를 위하여 살았지만 이젠 예수를 위해 살라고 합니다.

예수를 위해 산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겁니다.

자기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에요.

 

예수를 위해 살면 내 주변에 있는 분들이 혜택을 보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내 욕심대로 살았는데 이젠 예수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예전에 친구들이 우리의 이런 행동을 보고 자기들의 죄가 고발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싫어하는 거예요.

 

비유적으로 예수 믿기 전에는 회식자리에 가서 술을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고 그들과 같이 주색잡기를 하면서 개가 되어서 놀았어요.

그런데 예수 믿고 달라진 겁니다.

예전에 술을 많이 먹었는데 이젠 예수를 믿고 끊었어요.

 

그럼 친구들이 핍박을 해요.

야! 임마!

너 예전엔 안 그랬잖아!

우리하고 같이 술 먹고 개구신 짓을 했잖아!

그런데 왜? 술 안 먹는거야! 라고 화를 내요.

이는 자신들과 다름으로 있기 때문에 불편한 겁니다.

그래서 핍박을 해요.

 

이제는 예전처럼 사는 것이 싫어요.

왠지 술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싫어요.

가치관이 다르니 자연히 옛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옛 친구들과의 다른 사람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성도의 삶이 온전하거나 변했다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가는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육신의 정욕으로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방인들이 사는 것이 어둠이고 죄라는 것을 고발하는 빛에 아들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빛에 아들로서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 어둠이고 죄라고 고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의 정욕이 죄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대로 다 살아내지를 못해요.

하지만 구습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인간이 왜? 사는지를 안단 말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빌리면 과거엔 부어라 마셔라 즐겨라 라고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살았는데!

이젠 이러한 것이 삶에 목적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멀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속한 자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들하고 다르다고 재수 없다고 꺼지라고 합니다.

세상과 다름으로 존재하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 될 수가 없듯이 성도가 이방인과 멍에를 함께 할 수가 없어요.

다름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름이 자기 자유를 주의 이름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하도 복음을 핑계 삼아서 자기 사욕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요.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무슨 엄청난 복음을 아는 것처럼 주접을 떨고 있기 때문이에요.

 

복음 속엔 우리의 자유를 차압하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다시 영(靈)으로서 마귀의 참소에 대하여 이기는 방법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마귀는 늘 우리를 율법을 가지고 참소해요.

율법은 우리의 행실을 근거로 정죄합니다.

그러니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우리의 행실에 참소를 하면!

 

이거 왜? 이래!

내가 아직도 당신 아내인줄 알어!

아니야!

내 남편은 예수야! 라고 당당하게 살란 말입니다.

 

그게 예수라는 남편의 얼굴을 살리는 일이에요.

그렇지 않고 율법에 쩔쩔 매면 그건 예수라는 남편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를 망신시키는 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아내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더 이상 율법에게 휘둘리지 말고 죄 아래서도 예수의 아내답게 율법을 초월하고 은혜로 당당하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의 아내로 살도록 도우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은 은혜로 살게 하기 위해서에요.

 

이것을 오늘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위하여 맺어야 하는 열매는 은혜의 열매에요.

예수그리스도가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누리면서 사는 거에요.

이것을 예수를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옛날 개그콘서트에서 한창 유행 되었던 “내 아~를 낳아~도!” 라는 말이 있지요.

“내 아~를 낳아~도!” 라는 말은 경상도 사람들이 사랑하는 애인에게 프로포즈 할 때 이렇게 말을 한다고 풍자적으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걸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이라는 남편에게서 빼내서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오게 하였어요.

그럼 예수님이 뭐라고 할까요?

“내 아~를 낳아~ 도!” 라고 하겠지요.

 

예수님의 아이를 낳아 달라는 것이 뭔가요?

예수의 생명으로 살라는 말이에요.

그럼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어떤 삶인가요?

은혜로 사는 거에요.

 

율법이라는 신랑 아래서는 법으로 살았지만 예수라는 신랑 아래서는 은혜로 살아가야 해요.

우리 삶 속에서 은혜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내 자신도 은혜로 살아야 하지만 남에게도 은혜로 대하여야 해요.

내 자신도 율법에 정죄당하지 말아야 하지만 남도 율법으로 정죄하지 말아야 해요.

 

타인의 행실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정죄하지 말란 말입니다.

누구의 어떤 허물을 가지고 믿음이 있네! 없네!

판단하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용서받은 자에요.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속된 말로 죄를 짓는 자나 안 짓는 자나 도낀 개낀이에요.

다 거기서 거기에요.

상대방이 하는 짓을 우리도 하고 살아요.

 

예를 들어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만 놀아요.

하루 종일 TV를 보거나 바둑을 두거나 오락을 해요.

어떤 사람은 집에 안 있고 바깥으로 싸 돌아다니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시간만 나면 등산을 다니고 낚시를 다녀요.

어떤 사람은 음악듣기를 좋아하고 영화 감상하기를 좋아해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술을 좋아해요.

사람마다 각기 성격이 다르듯이 취미가 다르고 취향이 달라요.

 

그럼 묻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은 삶이고 어느 것이 그른 삶인가요?

어느 것이 정답인가요?

없어요.

세상 적 가치로 보면 집안에 있는 자가 옳고 술 처먹고 싸돌아다니는 자가 틀릴 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해요.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행실은 다 똑같아요.

하나님 앞에선 술을 먹는 자나 안 먹는 자나 동일해요.

술을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은 틀림이 아니고 다름이에요.

다름이란 같다는 말이에요.

 

틀림과 다름을 잘 이해하세요.

 

예수를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은 틀림이에요.

이건 종자가 다르다는 의미에서 틀린 거에요.

그러나 흰색 옷을 입는 것과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은 다름이에요.

사람마다 색깔을 선호하는 것이 달라요.

그러니 나와 다른 색깔의 옷을 입었다고 하여서 너 왜? 그런 색의 옷을 입느냐고 정죄하면 안 되어요.

 

이걸 조금 더 넓게 말해서 어떤 사람은 집안에 있는게 취미이고 어떤 사람은 돌아다니는 것이 취미에요.

그러니 집안에 있는 사람은 돌아다니는 사람을 나무라면 안 되는 거에요.

그건 성격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다름으로 살아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선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동일한 겁니다.

그러니 집안에서 낮잠 자고 TV보는 사람이 등산 다니고 술 먹고 나돌아 다니는 사람을 나쁜 놈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집안이 있는 사람이나 등산 다니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다 죄인이에요.

반대로 예수 안에 있으면 어떤 행실과 상관없이 다 의인이에요.

 

성도는 모두가 예수 안에서 용서 받은 자에요.

낮잠 자고 노는 사람도 용서 받았고, 싸돌아다니는 사람도 용서 받았어요.

회식자리에서 소주 먹는 사람도 용서 받았고, 사이다 마시는 사람도 용서 받았어요.

그러니 사람의 행실을 가지고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란 말입니다.

 

다 같은 죄인이고 다 같이 용서 받았는데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한단 말입니까?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의 행실을 가지고 잘잘못을 논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내가 그들을 정죄하는 그 정죄가 부메랑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와요.

그러니 사람의 행실을 가지고 정죄하지 마세요.

 

우리는 은혜를 보여주는 그릇들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사나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법으로 살고 있지 않나요?

내 자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법으로 대하잖아요.

 

뭔가 잘못을 하면 본능적으로 율법 아래서 행하던 습성으로 자신을 바라보잖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정죄하여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한숨짓잖아요.

급기야 하나님 앞에서도 율법적 사고로 나오잖아요.

 

이건 율법의 열매이지 예수의 열매가 아니에요.

예수의 열매는 내가 비록 죄를 짓고 산다고 하여도 예수의 피 흘리심으로 율법의 참소를 이기는 것이에요.

예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거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를 법으로 판단하고 있어요.

자기 행실로 희비한단 말입니다.

자기 안에 선악의 법에 의한 옳은 일을 했다고 하면 의기양양(意氣揚揚)하고 그른 일을 했다고 하면 의기소침(意氣銷沈)하여 주눅이 들어 살잖아요.

자기 행함을 근거로 울다가 웃다가 하잖아요.

자기 행함을 근거로 상좌에 앉았다가 말석에 앉다가 하잖아요.

 

이게 비단 내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도 적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를 대할 때에 용서받은 자로서 은혜와 긍휼로 대하지 않고 법으로 대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의 행동을 율법으로 판단하고 있어요.

 

법으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잖아요.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모든 것은 다 판단하고 심판하잖아요.

복음 안다는 것을 법으로 활용하고 있잖아요.

자기만 옳다고 하고 있잖아요.

 

나만 복음 안다!

내가 아는 복음만 진짜다!

우리 목사님만 복음 전한다!

우리교회만 진짜 교회다! 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복음 모르는 사람들을 깔보고 자신은 엄청 우등한 자라고 유세를 떨잖아요.

복음을 모르면 업신여기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아니~!

복음은 우리 능력으로 안 것이 아니잖아요.

은혜로 알게 된 것이잖아요.

복음은 우리가 공부하고 배워서 안 것이 아니에요.

예수는 내가 열심을 내서 믿어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깨닫게 해 주시고 믿어지게 해 주신 것이잖아요.

 

그럼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업신여기고 잘난 척 힘으로 사용하면 안 되지요.

도리어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감사하면서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해하고 인내하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잖아요.

 

이게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거에요.

은혜로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아요.

이와 반대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에이~ 저 교회는 복음 전하지 않는데 라고 하면서 교회도 안가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아요.

 

저에게 많은 분들이 전화를 해요.

전화를 해서 말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어서 갈 교회가 없다고 해요.

그래서 교회에 안 다닌다고 해요.

 

그럼 뭘 하느냐?

놀아요.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거나 글을 본다고 해요.

이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에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복음을 지식으로 이해하고 곡해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일시적인 현상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착화 되어서 마치 교회 안 다니는 것이 무슨 대단한 신앙이고 온전한 신앙인냥 이해를 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이 받은 은혜가 있으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섬기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떠나서 가까운 교회에 가라고 합니다.

주께서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어요.

 

나를 다스리는 분이 주님이세요.

주님이 낮잠 자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를 가지고 뭔가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서 하셨던 일을 하게 하세요.

 

예수님은 복음을 모르는 어둠 속에 오셨어요.

죽은 자들 속에 산 자로 오셨어요.

이는 죽은 자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자기 성도들에게 그대로 행하게 하세요.

이를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았어요.

그럼 여러분들 말대로 저 교회는 복음을 몰라요.

그럼 양이 이리 가운데로 가는 것처럼 복음 아는 내가 복음 모르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야지요.

가서 복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 증거 해야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지 않아요.

왜냐하면! 싫거든요.

복음 전하다 욕을 먹기 싫어서에요.

가서 복음 안다고 잘난 척 하다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 때문이에요.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 아는 것을 주둥이로만 잘난 척 하니까 미움을 받는 거에요.

가서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섬겨 보세요.

봉사도 하고, 연보도 하고, 성도를 섬기고 사랑해 보세요.

그럼 욕하지 않아요.

 

내가 헌신하면서 복음을 전해 보세요.

잘난 척 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복음을 이야기 해 보세요.

그럼 그 속에서 주께서 택한 백성을 만나게 하고 교제케 하세요.

그러니 저 교회는 복음 전한다 안 전한다 따지지 말고 내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 집구석에서 빈둥거리고 놀지 말고 어느 교회이든지 가서 섬기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복음 안다고 하면서 가지 않는 것은 복음을 자기 면피용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게으름을 복음으로 합리화하는 거에요.

이걸 성경에서는 진리를 색욕거리로 삼는다고 해요.

이건 복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악용하는 악한 것이에요.

 

우리는 복음으로 우리 일신상의 편함을 도모하고자 해요.

이게 죄성이거든요.

그래서 복음을 빙자하여서 자기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안 가고 인터넷으로 예배드린다고 해요.

이건 예배가 뭔지를 모르는 거에요.

그리고 왜?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했는지를 모르는 처사에요.

 

성도는 “나”로 구원 받지 않고, “우리”로 구원을 받았어요.

“나” 라는 개인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우리‘ 로서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를 교회라고 해요.

우리는 하늘 예루살렘 성전의 벽돌들이에요.

하나 하나가 모여서 성전을 지어가요.

그러므로 “나”로 있으면 안 되고 “우리”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집을 오면 남편에게 속한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이 된다고 하였지요.

 

남편의 가족이 이제 내 가족이 되는 겁니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형제들이에요.

이들과 새로운 사귐을 가져야 해요.

 

집에서 인터넷으로 설교 듣는 것은 그냥 설교 듣는 거에요.

그건 예배가 아니에요.

복음을 듣는 것은 밥을 먹는 것과 같아요.

밥을 먹는 것은 일하기 위함이지 놀기 위함이 아니에요.

 

예배가 뭔가요?

모임이고 교제하는 것이에요.

위로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예수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이 모여서 주께 받은 은혜를 서로 교제하는 거에요.

 

서로 섬기며!

서로 나누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권면하고!

서로 우애하고!

서로 짐을 지고!

 

서로 연결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에요.

“서로”에요.

이 “서로” 됨을 간과치 마세요.

 

“서로” 가 되려면 모여야지요.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으로 가야지요.

가서 만나야 해요.

 

그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풍성함을 보게 되고!

또한 성도를 섬기는 것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유익을 위하기보단 자기 유익을 위하고자 하는 우리 안에 감추어진 내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자아(自我)라는 죄들이 폭로가 되어지기도 해요.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하늘에 있는 장자들이 총회가 있다고 합니다.

 

장자들의 총회(總會)란? 구원 얻은 성도의 모임이에요.

이걸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천국 생활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지상에 있는 교회는 하늘에 있는 교회인 “장자들의 총회”를 표상으로 세워졌어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러한 장자들의 총회와 같은 교회로서의 모임의 예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자발적으로 하늘나라에서의 예배의 모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천국 백성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서 주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서로 한 몸으로서 섬기고 사랑하고 교제하였어요.

 

이게 예배에요.

모여서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나누며 우리의 소속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기뻐하며 감사하였어요.

애찬을 나누면서 우린 한 떡을 먹은 형제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구요.

 

예배란? 천국 백성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사로 서로 교제하고 섬기면서 주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거에요.

그러자면 교회에 모여야지요.

 

가정에서 모이든지!

교회에서 모이든지 모여야지요.

혼자 있지 말고 모여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면서 천국백성으로의 삶을 맛보고 살아야지요.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였어요.

얼마나 기쁘고 좋았으면 날마다 모였겠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겁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 말은 그 당시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 하였다고 하니까 어떤 놈들이 은혜를 곡해하여서 이젠 성전에 모일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고 있던 자들이 있었어요.

 

이런 자들을 바울은 십자가를 자기의 색욕거리로 삼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이들을 영지주의자라고 해요.

그런데 이런 자들이 지금도 있어요.

어느 시대이고 있었어요.

초대교회 당시에도 은혜를 곡해하는 자들이 있었듯이 지금도 있어요.

특히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 많았어요.

 

제가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글을 읽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한 부분이에요.

 

자유와 방종은 달라요.

성경이 말하는 자유란?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자기 자유를 박달당하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성도의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성도에겐 자기 맘대로 살 자유가 없는 겁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방종이라고 해요.

그리스도의 몸에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을 방종이라고 해요.

 

복음을 아는 것은 복음으로 살기 위함이지 복음 아는 것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은 그 복음으로 룰루랄라 놀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로 보내심을 입게 되어요.

 

요한계시록 11장을 보세요.

두 증인들이 나오지요.

두 증인들은 바로 우리 성도들이에요.

 

하나님이 먼저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지요.

작은 책을 일컬어 영원한 복음이라고 해요.

그러니 하나님이 두 증인들인 우리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어요.

 

우린 복음을 듣고 먹을 때는 너무도 달콤하고 행복했어요.

복음을 깨달을 때는 너무도 황홀하고 기뻐요.

마치 수가성 여인이 예수를 만나고 난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어요.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에요.

나 복음 안다 땡!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작은 책을 먹여 놓고선 율법적 교회로 보내요.

복음을 모르는 교회로 보낸단 말입니다.

이제부터 복음 먹여 놓고 아픔의 현장으로 밀어 넣는 겁니다.

이건 마치 머슴들에게 밥을 잔뜩 먹여 놓고 밭에 일을 하러 보내는 것과 같아요.

 

두 증인들은 전부 율법적 교회에서 죽임당해요.

이건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는 거에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죽이게 하려고 작은 책이라는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디로 보내던가요?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지요.

이건 가서 싸우란 말이 아니에요.

그들을 섬기고 봉사하라는 거에요.

그냥 힘없이 죽임 당하라는 말이에요.

 

이리에게 잡아먹히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이리의 먹잇감으로 보내는 겁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죄인들의 양식으로 보낸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먹잇감으로 오셨어요.

우리를 섬겼어요.

우리가 예수를 잡아먹었어요.

 

우리가 예수를 잡아 먹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어요.

죽은 줄 알았던 예수가 우리 안에서 살아서 일을 하는 겁니다.

나를 살리는 일을 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라는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이 먼저 두 증인에게 작은 책을 먹이지요.

작은 책은 복음이에요.

예수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예수를 먹여 놓고서 이제 예수로 산 자를 만들어서 이리들이 있는 교회로 보내는 겁니다.

그들에게 먹잇감으로 주는 겁니다.

그럼 두 증인들을 먹은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가 죽어서 우리가 사는 것처럼 말이에요.

두 증인들이 증거하는 복음을 듣고 법 아래 있던 자들이 은혜 아래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알았으니 이제 갈 교회가 없다는 말은 교만인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 양식으로 주어서 우리로 살게 하셨듯이 이젠 예수를 먹인 우리를 복음을 모르는 교회에 보내서 죽게 하여서 그들을 살려 내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에 있는 구원 받은 성도들을 일컬어 전부 목 베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두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자기 삶을 차압당하고 예수의 것으로 살게 하였단 말입니다.

 

이게 시집살이에요.

여자는 남편에게 시집을 오면 빈둥거리고 놀지 못해요.

남편이 여자를 데리고 올 때 그냥 데리고 온 것이 아니고 값을 주고 사 왔어요.

이제 데리고 와서는 본전을 빼내는 일을 하게 하세요.

남편의 일에 동참케 한단 말입니다.

 

이게 새 생명으로서의 삶이에요.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새로운 남편과 살아가는 시집살이란 말입니다.

여자가 시집을 오면 시집살이를 하잖아요.

 

구원이라는 말 속에는 무엇을 위하여서~ 라는 말이 담겨져 있어요.

이걸 예수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예수의 종으로 사용하려고 율법에게 값을 주고 사온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와서도 노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남편이 하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란 말입니다.

그럼 당연히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삶이 있겠지요.

 

성도는 옛 남편에게서 해방이 되고 새로운 남편에게 시집을 왔다고 하였습니다.

옛 남편은 율법이라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갈라섰어요.

그럼 옛날 신랑의 말을 들으면 간음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옛날 방식으로 살아선 안 되는 겁니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 있어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해요.

 

새로운 신랑이 바라는 삶이 있단 말입니다.

그 삶이란? 바로 새로운 신랑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라는 신랑의 말을 들어야 해요.

 

예수라는 신랑이 뭐라고 하는가요?

예수의 피 안에서 살라고 하잖아요.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서 살라고 하잖아요.

이것을 6절에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디 은혜 가운데서 넉넉한 자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을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보내 주어서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온 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 신랑이 바라는 모습으로서 살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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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성경강해(롬) 투명한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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