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내 대신 죽어 주신 예수님 (히 2:5-9)
카테고리 : ╁'성경강해 | 조회수 : 1242020-01-20 오전 5:54:00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전 언약 (에베소서 1장 3-10)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정낙원 목사

 내 대신 죽어 주신 예수님 (히 2:5-9)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보다도 못한 존재로 왔다고 합니다.


오셔서 그것도 인간들 손에 힘없이 죽었답니다.


이는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강하신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멸망 받아야 할 이 세상에 대통령의 아들들도 무소불의의 힘을 사용하는데, 하나님에 아들이라는 분이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 인간의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스럽습니다.


 


이러니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의 상식으로 알고자 접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식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일부러 천사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보내신 것도 비밀에 속한 것입니다.


 


잠깐 동안 그랬다는 것은 뭔가 목적이 있어서 한시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꼭 그렇게 아들을 죽게 하여야만 했나요?


예수님이 꼭 죽음을 맛보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소하게 들리지 않지만 만약 처음 성경을 대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무지 불가해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뭔가를 이루시기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대신 죽기 위해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어주신 것이라면 성도는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으로서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성도가 죽음에서 벗어난 것을 무엇을 뜻할까요?


육신이 죽지 않는단 말인가요?


아니면 죽음의 권세로부터 벗어났다는 말인가요?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 온 것은 죄로 인하여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로부터 정죄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죄는 율법으로 죄인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럼 법이 어떻게 세상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전능이란?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시는 강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그러면 무섭고 강한 분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런 사고는 선악의 법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법은 힘에 논리로 구조가 짜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神)이 강한 신(神)이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린 나약한 예수는 싫어요.


죽음을 깨트리고 찬란하게 부활한 예수를 원해요.


 


부활한 예수를 힘입어서 스스로도 강한 영적 힘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흔히 카리스마라고 해요.


그래서 육적 목사들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보다 부활한 예수를 선호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왠지 약해 보이고, 부활하신 예수는 강해 보이기 때문이에요.


 


부활한 예수를 말함으로서 자신도 그 부활의 능력을 가진 종으로 어필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목사가 말 한마디 하면 온 교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주기를 바래요.


이런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육적 목사들의 꿈이에요.


교회를 자기 소유화 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러자면 교인들보다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교인들이 범접 할 수 없는 능력이 있어야 교인들을 다스릴 수가 있어집니다.


왜냐하면! 힘과 힘이 충돌하면 강한 자가 이기기 때문입니다.


 


강한 영적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찾고 또 찾습니다.


그래서 일명 성공 했다는 대형교회 목사들을 벤치마킹하고 그들을 따라 해 보는 겁니다.


선배 목사들의 신앙을 살펴보니 교인들보다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 겁니다.


 


교인들 보다 더 깨끗하고 청렴하고,


교인들보다 더 거룩하고, 품위가 있어야 하고,


교인들보다 더 기도도 많이 하고,


교인들보다 금욕이나 고행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사십일 금식기도다.


365일 철야 기도다.


산 기도다.


좌우지간 교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는 이런 탐욕을 이용해서 목사를 교주로 만드는 겁니다.


교회를 사유화 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교회 그러면 아! 그 목사! 라는 수식어가 붙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이러면 그 교회에선 목사의 말이 곧 진리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은 명함조차 내 밀 수가 없어요.


예수는 보이지 않고 목사는 보여요.


이렇게 되면 목사는 보이는 부활한 예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예수를 말하고, 강하고 힘 있는 예수를 말을 하는 겁니다.


자신을 강하고 능력 있는 예수화 하는 겁니다.


예수의 능력이 마치 자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교인들에게 각인 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은사나 부활신앙입니다.


교인들도 십자가 지신 예수는 나약한 것으로 생각하고, 부활하신 예수는 강한 예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로 나아갑시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부활신앙을 말하면서도 정작 부활 신앙이 어떤 것인 줄을 몰라요.


그냥 부활! 부활!


그러면 부활신앙이 되는 줄 알아요.


부활신앙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말 한다고 해서 부활 신앙이 아니에요.


 


부활 신앙은 역설적으로 나를 날마다 십자가에 넘겨주는 것이에요.


이게 비밀이에요.


가짜들은 몰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일하고 계신 겁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부활 신앙을 들어봅시다.


 


빌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지금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하지요.


이 말씀이 무슨 뜻인고 하니 부활은 반드시 십자가를 거쳐서 나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권능은 죽음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내가 죽을 때 예수님의 부활신앙이 내게 나타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어렵지요.


쉽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의 죄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죄인인 나” 도 함께 죽은 겁니다.


그럼 난 산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죽은 자이지요.


 


그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나는 어떤 나” 입니까?


“죄 아래서 난 나” 이지요.


죄 아래 있는 나는 무엇으로 내가 죄인이라고 알려 줍니까?


율법이지요.


율법이 너는 죄인이야! 라고 정죄를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나” 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나” 이지요.


그렇다면 부활신앙이라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율법으로 정죄 받던 나” 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이 부활 할 때 같이 살아난 나” 는, “율법과 상관없는 나” 로 부활을 하였잖아요.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니 십자가를 거친다 함은 “나 없음” 이 전제가 된다는 말이에요.


나라는 존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로 살지 않고 예수 안에서 나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눈치인데!


 


자 보세요.


여기 내가 있어요.


이 나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으로서 나” 입니다.


이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는 율법이 따라다니면서 넌 죄인이라고 추궁을 당하지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추궁을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에 좇기는 나를 안고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겁니다.


그럼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는 죽은 것이지요.


이를 “옛 사람의 죽음” 이라고 해요.


 


그런데 죽었던 내가 예수님이 부활을 하실 때 함께 살아났어요.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지요.


이를 “새 사람인 나” 라고 합니다.


 


새 사람인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나에요.


독자적인 내가 아니고 예수님께 복속(服屬)된 자로서의 나란 말입니다.


복속(服屬)이란? 예수님과 엮여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의 몸에 지체라고 해요.


 


난 누구냐? 예수님의 몸에 지체로서의 나에요.


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해요.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서였잖아요.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잖아요.


그런 예수 안에 있는 나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겁니다.


과거의 나는 율법에 쫓겨 다녔는데, 지금의 나는 율법에 좇길 이유가 없지요.


 


이렇게 되면 새 사람인 나는 율법과 상관이 없지요.


그럼 새 사람인 나에게 어떤 삶들이 나타나야 합니까?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서 의로워진 나” 로 살아야겠지요.


 


그럼 부활신앙이란 어떤 겁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모습으로 나타나야하지요.


 


그래서 바울이 나는 예수님의 피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날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이 육신은 십자가에 죽이는 삶을 산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난 예수와 함께 죽었으니 율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산다고 하는 겁니다.


나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한마디로 내가 죽었으니 나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내가 뭘 하고 안하고 라는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뭘 하고 안하고 하는 인간은 과거 율법 아래 있던 인간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살고 있는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율법 아래 내가 아니에요.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는 나란 말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치외법권(治外法權)에 있는 나에요.


 


이해되시지요.


잘 정리해서 들으셔서 말씀이 힘이 되고 능력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거짓 복음을 분별하고 넘어지지 않아요.


 


율법으로부터 치외법권에 있다는 것을 성화주의자들이 이해를 못해요.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서 눈을 떼지 못해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 말씀 속에서 뱅뱅 돌아요.


못 나와요.


그러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신앙생활은 모순적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부활 신앙을 누가 강조하느냐 하면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이들은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로 나아가야 한다고 해요.


말은 맞는데 그 부활 신앙이 뭔지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부활의 능력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몰라요.


부활신앙이란? 내가 말씀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루어 주신 것으로 사는 겁니다.


부활 신앙은 누림의 신앙이지 일하는 신앙이 아니에요.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려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도 어렵지요.


 


쉽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려고 하고자 하니 성령이 그러는 겁니다.


야! 이놈아! 니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하려면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의 부활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내 죽음 속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럼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무엇에 대하여 죽는 겁니까?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2장 19절입니다.


 


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함이라고 하지요.


잘 들으세요.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지요.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뭔가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라고들 해요.


이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 할 때 하는 말이에요.


 


옛 언약은 뭐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내 대신 다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말씀이든 신약의 말씀이든 내가 지켜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고 구약 시대 사람이에요.


반대로 신구약 그 어떤 말씀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주셨다고 믿으면 그 사람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고 신약시대 사람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은 구약 사람이 되지요.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거에요.


그러니 말씀이 늘 지켜야 할 것을 강요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만나 주지 않아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여전히 아담 안에 있는 육이에요.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부활한 자들만 만날 수가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만이 만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알겠지요.


 


그럼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요.


율법 밖에 계시지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말해서 십자가 밖은 율법이 살아있는 동네가 되고, 십자가 안은 율법이 죽은 동네가 되지요.


십자가 안은 신약이고, 십자가 밖은 구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은 율법의 요구 때문에 죽었지요.


율법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 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백성들의 죄값을 대신 받은 거잖아요.


 


율법이 성도들에게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죽는 것 알아! 몰라!


아는데요!


그럼 넌 죽어야지!


 


그럴 때 예수님이 율법 앞에 나타나서 내가 저 아이 죄값을 대신 치르겠다고 하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음을 맛보셨다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심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내 대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 말씀 앞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예! 앞으로 말씀 잘 듣겠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는데요! 라고 해야 합니까?


당연히 예수님께서 내 대신 다 담당해 주셨는데요! 라고 하여야겠지요.


 


부활신앙이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이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가둘 수가 없는 신앙이에요.


이건 개차반으로 막 살아도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뜻을 말하고자 함이에요.


 


자! 이렇게 설명할게요.


 


어떤 부잣집 아이가 있어요.


이 아이가 지체부자유자라서 늘 절뚝거리면서 다니다가 보니 항상 사고만 치고 다녀요.


서고를 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결함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동네 골목을 지나가다가 곁에 세워 놓은 남의 차에 넘어져서 긁어 놓곤 합니다.


 


이를 잘 아는 아이의 아빠인 부자가 그 동내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가 반풍수라서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골목길을 지나다니다가 여러분들이 차을 긁어 놓곤 할 겁니다.


 


그러니 혹시 이 놈이 놀다가 댁에 차를 긁어 놓거든 나무라지 말고 그려러니 하고 이해해 주세요.


제가 새 차 값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새 차를 사 준다고 하는데 손해 볼일이 아니라서 흔쾌히 그러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곤 아들에게 다니다가 넘어져서 남의 차를 긁거든 아빠가 그 차 값을 다 변상해 주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럼 아빠의 말을 믿는다면 이 아이는 설령 자기가 부주의로 차를 긁었다고 하여도 그 일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면 안 되겠지요.


아빠가 책임질 거라고 하여야 겠지요.


 


그럼 여기서 아이의 믿음은 뭡니까?


자기 행동을 반듯하게 고치는 겁니까?


아니면 차 긁지 않고 다니는 겁니까?


그도 아니면 차 수리를 자기가 해 주겠다고 하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의 잘못을 아빠가 책임져 준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겁니까?


 


아빠가 자기 대신 책임져 준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이러면 이 아이는 항상 아빠의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감사하겠지요.


그렇지 않고 자기 행동을 고쳐서 아빠 도움 없이 산다고 하면 아빠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게 되겠지요.


 


죄가 뭐냐!


아빠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겁니다.


탕자가 집에 와서 평생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거에요.


맏아들 같이 아버지 은혜로 산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자기의 반듯한 모습으로 산다고 하면 아버지가 고맙지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알고 그 아들에게 감사하며 사는 거에요.


그래서 부활 신앙은 성화해서 반듯해지자는 쪽으로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산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해되지요.


 


우리는 죄인이라서 늘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태생적 한계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리려고 성령을 성도들에게 보내 주셨어요.


그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행동을 반듯하게 하자고 하겠어요?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대신 치러주셨다는 것을 증거하겠어요?


당연히 우리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죄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자랑하겠지요.


 


성령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오신 것도 다 이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성도에게 알리기 위해서에요.


그래서 성령을 부활의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처럼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이후에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에요.


이제 성도들 안에 부활의 영인 성령이 와 계세요.


그럼 성도는 성령이 오면 부활 신앙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부활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께서 너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일러 주십니다.


너희가 지켜야 할 율법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했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럼 진정한 부활 신앙이란 뭡니까?


내가 말씀대로 사는 겁니까?


아니면 말씀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내어 놓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내어놓는 것이지요.


 


부활 신앙은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이 나와야지 자기가 성화하고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오면 안 돼요.


그건 부활 신앙이 아니고 예수 밖에 있는 신앙이에요.


 


예수 밖에 있으니 자꾸만 자기가 뭘 하여야 한다고 설쳐 대는 겁니다.


성령을 못 받아서 믿어지지는 않으니 성화하고 말씀대로 살아서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이 안 믿어지니 자기가 행하고자 하는 거에요.


이건 말씀대로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이러면 이 시대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부활 신앙은 성령이 말하는 부활신앙과 다르지요.


한국교회에선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 라고 하잖아요.


점 점 더 성화하자고 하잖아요.


날마다 자신을 갈고 닦자 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부활신앙은 도리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악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개혁주의와 성화주의는 이단이라고 매섭게 몰아 부치는 겁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지금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이처럼 외쳐도 외면당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선 비주류로서 힘이 없기 때문이에요.


제가 만약 조용기 목사처럼 세계 제일의 교회를 가지고 이런 말씀을 전하면 다 찬동할 겁니다.


그런데 교인도 없고 변변치 않는 자가 말하니 신청되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은 외모로 그 사람의 말을 판단을 해요.


이게 세상의 구조에요.


 


예수님도 버림 당한 것도 비주류였기 때문이에요.


어느 시대이고 진리는 비 진리의 힘으로부터 외면당해 왔어요.


이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진리를 바탕으로 사는 자들을 찾아내시는 겁니다.


이게 비밀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유대인들처럼 자기들 의(義)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義)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자기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엄청나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인 줄 알아요.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알고 착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인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였어요.


경건 운동을 벌린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니까요.


아주 아이러니 하지요.


경건 운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은 전혀 달라요.


이걸 예수 안과, 예수 밖이라고 하는데!


예수 밖에서 하나님 말씀을 대하면 그 말씀이 살아 있어요.


살아서 인간들에게 다가 와요.


 


그러니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씀으로 안 죽으려고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고자 애쓰는 겁니다.


하루라도 말씀의 요구를 거부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날마다 저주에 쫓기게 되는 겁니다.


 


바울의 증거를 다시 들어 봅시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보세요.


율법이 따라다니면서 너 했어! 안했어! 추궁한다고 하지요.


그러니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쉼이 없어요.


항상 말씀이 살아서 미사일처럼 쫓아다니면서 너 지켰어! 안 지켰어! 라고 밀어붙이는데 어찌 쉴 수가 있겠어요.


만약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법이 미사일처럼 와서 꽝 하고 때립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죽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다는 죄 값으로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성도도 같이 죽었어요.


 


법은 죽은 자에겐 추궁하지 않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으니 수사를 종결한다고 하지요.


법이 요구하는 것은 감옥에 넣는 것이고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죽으니 더 이상 법을 집행 할 수가 없어요.


 


율법이 성도를 너 왜? 죄 지었어! 라고 몰아붙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고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려서 죽어버렸어요.


죽으니 율법이 수사 종결을 선언했어요.


 


그런데 죽었던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이젠 율법이 정죄 할 수가 없어요.


이미 죽음으로서 수사를 종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성도는 율법하곤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어요.


율법 쪽에서 보면 예수 안은 안 보여요.


마치 안에서는 바깥이 훤히 보이고 바깥에선 안이 안 보이는 그런 유리와 같아요.


 


예수 안은 율법이 침노 할 수가 없는 영역이에요.


율법은 예수 밖에만 보여요.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쫓아다니면서 추궁해요.


 


율법 쪽에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안 보이는 귀신들이에요.


유령이에요.


율법을 가지고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미치지 않는 곳이에요.


 


성화주의가 이단인 것은 법 아래서 예수를 보기 때문이에요.


법은 말이죠.


동등함을 인정하지 않아요.


 


100원을 훔친 놈하고 1000원을 훔친 놈하고는 형량이 달라요.


큰 죄와 작은 죄로 구분해요.


항상 차별성이 따라 다녀요.


 


여러분 성화주의자들을 보면 차등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가 딱 잡혀 있어요.


법에 속한 사람은 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자기 자리로 찾아가요.


자기보다 내공이 센 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숙이고, 자기보다 내공이 약한 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세워요.


 


노회에 가보면 완전히 조폭 집단과 똑 같아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기어요.


큰 교회 꿰차고 있는 목사들은 딱하니 앉아 있으면 적은 교회 목사들은 찾아가서 굽실거려요.


그래야 아쉬울 때 청탁도 하고 헌신예배라도 한번 불려 가기 때문이에요.


 


이게 법의 특징이에요.


성화주의로 말하면 말씀대로 산 사람과 못 산 사람 간에 차별이 있어요.


점수 높은 놈이 상좌(上座)에 앉아서, 하수(下手)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계합니다.


 


그래서 성화주의자들 속엔 우열(優劣)이 있고, 차별이 있고, 스승과 제자가 있게 되는 겁니다.


거룩한 자,


조금 더 거룩한 자,


조금 더 더 거룩한 자,


아주 많이 거룩 한 자,


최고로 거룩한 자로 나누어요.


 


부목사도 그냥 부목사가 아니고 수석 부목사와, 차석 부목사로 서열이 정해져요.


임시목사, 위임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찰, 평신도로 등급화 되어 있어요.


장로로 수석장로, 차석 장로로 등급이 매겨져요.


각 기관도 회장, 부회장, 서기, 부서기로 서열이 정해져 있어요.


 


이런게 성경에 없거든요.


그런데 힘의 원리로 다스려지는 세상 조직을 본 따서 만든 겁니다.


세상이 교회 안에 그대로 착상 한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교인들을 차별화 하여서 잘한 놈들을 일을 시키고자 완장을 채워 준 겁니다.


인간들은 감투하나 씌워 놓으면 충성 경쟁하게 되어 있어요.


 


이 시대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강도의 굴혈이에요.


교회가 아니라 조폭집단입니다.


법으로 다스려지니 넘버 원, 넘버 투, 넘버 쓰리 같은 상하(上下)가 있는 깡패 집단인 겁니다.


 


목사 계보로는 당회장은 보스로서 넘버 원이고,


부 목사는 넘버 투이고,


전도사는 넘버 쓰리로 당회장 시다바리에요.


 


교인들 계보로는 장로는 넘버 원이고,


안수집사는 넘버 투이고,


집사는 넘버 쓰리이고,


평신도는 행동대원들이에요.


위계질서가 분명해요.


완전히 조폭집단과 똑 같아요.


 


상좌(上座)에 앉아 있으려면 하수(下手)들보다 더 노력해야 해요.


헌금도 많이 해야 하고.


기도도 많이 해야 하고.


충성 봉사도 많이 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깨끗하게 살아야 하고,


한마디로 품위 유지를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귄위가 서지 않아서 아랫 것들이 말을 안 들어요.


이게 성화주의자들의 세계에요.


성화주의엔 평등이니 은혜는 없어요.


오로지 말씀대로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라는 법 뿐이에요.


많이 성화 했으면 이긴 자로서 남에게 말할 수 있는 발언권(發言權)이 생기지만, 성화하지 못하면 진 자가 되어서 입 닥치고 있어야 해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차별이 없어요.


우열(優劣)도 없어요.


상명하복(上命下服)도 없어요.


예수 밖에서 보면 완전히 콩가루 집안처럼 보여요.


모두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처럼 보여요.


맞아요.


 


예수 안에선 모두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들이에요.


오로지 머리되신 예수님의 지시만 받고 인간의 지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걸 자유(自由)라고 해요.


 


자유(自由)가 뭡니까?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잖아요.


그래요.


성도는 그 안에 성령께서 늘 간섭하시기 때문에 알아서 움직여요.


그러니 목사가 간섭할 필요가 없지요.


 


어떤 사람은 예수 안에서 자유자라고 하니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예수 안에서 자유케 한 것은 내 마음대로 살라고 자유를 준 것이 아니에요.


예수 안에선 나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의 자유는 예수의 종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게 아니에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예수 밖에 있다는 증거에요.


예수 안에선 자기 마음대로가 없어요.


주를 위해서만 있어요.


성령께서 늘 넌 죽은 자야!


넌 없는 자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하는 이유도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에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육신이 끄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복음을 모르고나 오해하여서 그래요.


성화주의자들이 공격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 너희들은 맨 날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사는 것은 개판으로 산다는 겁니다.


교회도 안 나가고 입만 살아서 나불거린다고 해요.


오로지 자기편한대로 산다고 욕을 하는 겁니다.


 


맞아요.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 안에 복음을 이용하여 자기 편한 대로 사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도 이런 자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자라고 해요.


한마디로 복음과 상관없는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 때문에 십자가가 희롱 당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좇아낼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내 주셨기 때문이지요.


 


성화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을 보고서 십자가는 방종하고 방탕하게 한다고 공격하는 겁니다.


가짜들 때문에 십자가가 수욕을 당하는 겁니다.


빈둥거리면서 교회에 안온다면 그걸 어찌 신자라고 하겠어요.


그건 자기 종이지 예수의 종이 아니지요.


 


예수의 종이라면 반드시 복음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어요.


성령이 그렇게 몰아가세요.


복음과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냥 동호회 회원이지요.


 


물론 믿음이 연약하여서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두고 보면 진짜는 다 스스로 일어섭니다.


그러니 속단하지 말고 기다려 주는 것도 지혜로움이에요.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에요.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께 맡겨 두시도 우린 받은 은혜로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러니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보고서 실족할 이유가 없어요.


얼마나 교회가 오기 싫고 복음 듣기가 싫었으면 주일날 놀러가고 빈둥거리고 있겠어요.


본인의 마음속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너 왜? 예수를 사랑하지 않느냐! 라고 타박하면 물어뜯어요.


그냥 가만 두세요.


신자가 아닌 사람을 신자라고 생각하니 열을 받는 겁니다.


 


저희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어느 교회라도 다 이런 사람들은 있어요.


그러니 십자가 피만 전하는 교회에는 다 성도가 있다고 판단하지 마세요.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교회 안에도 가라지가 있어요.


하지만 가라지를 심어 놓은 분이 하나님이세요.


굳이 뽑아 낼 이유가 없지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요.


어떻게 사용하실지 우린 몰라요.


우린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면 되요.


 


이에서 벗어나서 목사가 교인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교인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입맛에 맞는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교인들을 목사의 입맛에 맞출 필요가 없어요.


 


교인들이 자기 입맛에 안 맞는다고 목사가 법으로 가두고자 해서는 안돼요.


진짜 성도라고 한다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그 길이의 풍성함을 알아 가도록 간섭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다 보면 진짜 성도는 돌이킬 것이고, 가짜는 영 다른 길로 나가겠지요.


 


여러분! 신앙생활은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르쳐서 될 것이 아니에요.


교육한다고 해서 사랑이 생기지 않아요.


그 누구도 사랑을 마음속에 넣어 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예수를 사랑하세요! 라고 하면 그 속에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할 것이고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요.


 


교회 오세요.


충성 봉사 하세요.


형제를 사랑하세요.


기도하세요.


헌금하세요.


전도하세요.


말씀을 보세요.


 


이러한 것들은 하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들이 아니에요.


자기 안에서 성령이 주장을 해 주어야 해요.


물론 교육으로 법으로 강요하면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가르치고 강요하여서 하는 것은 종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니 강요하거나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복음을 듣고자 하는 쪽으로 몸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끌고 앉혀 놓아도 다른 생각해요.


마음으로 믿어지는 일이 없으면 백약이 무효에요.


 


위에 언급한 것들은 자기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덮쳐오면 하지 말라고 해도 나와요.


교회 가고 싶고, 봉사하고 싶고, 헌금하고 싶어지고, 전도하고 싶어지고 해요.


이걸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이 들면 막는다고 막아지지가 않아요.


 


말씀이 고파보세요.


그러면 블로그에 들어와서 글을 읽어요.


복음이 고프지 않으면 컴퓨터에 앉아서 게임은 해도 블로그에 글을 안 읽어요.


 


성화론자들이 눈에는 교인들을 일체 간섭하지 않고 교육하거나 관리하지 않으니 방종으로 보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법이라는 안경이 씌워져 있기 때문이에요.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는 자유를 맛보지 않아서 몰라요.


법으로 단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선이냐! 악이냐! 라는 이분법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요.


 


그러니 실수나 잘못을 용납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참소하는 것이 그냥 술술 나오는 겁니다.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장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집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목사라고 해서 죄성이 사라지지 않아요.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안다고 해서 죄성이 없어지지 않아요.


죄성이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복음이 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의 오해는 예수 믿으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치관에 변화는 달라져요.


땅만 바라보던 사람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안목에서 바라보던 것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보고 사는 것은 달라져요.


 


그러나 인간의 근본은 변하지 않아요.


근본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성이 사라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죄성이 그대로 있으니 성질 낼 것 다 내는 겁니다.


 


물론 육신의 소욕을 참고 분을 삭이고 억누를 순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것이 성화가 된 것이 아니에요.


언제 또 터질지 몰라요.


여건만 조성 되면 성질머리가 그대로 튀어나와요.


 


제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나름대로 경건하게 산다고 살았어요.


(물론 예수 안에서 보면 경건도 아니지만)


세속과 담을 쌓고 살다시피 살았어요.


유행가도 세속 음악이라고 해서 약 20여년을 부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몇 해 전에 명절에 처가에 가서 가족들끼로 노래방에 갔어요.


처음엔 유행가를 불러 본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다 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화면에 가사가 나오는 것을 따라서 막상 한곡을 불러보니 세상에 과거 20년 전에 저장 되었던 것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난 깜짝 놀랐어요.


난 분명히 20여 년 동안은 유행가 불러 본적이 없어요.


유행가는 내 안에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환경이 되니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이 튀어 나오더라고요.


 


이와 같이 우리의 죄성도 죽은 듯하지만 여건만 되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개과천선 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 그대로를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내가 얼마나 거룩해 졌고 참신해 졌는지에 관심을 두면 안돼요.


우리 속엔 죄인이 가지고 있는 성질머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숨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옛날 구정물을 모아놓은 단지 속과 같아요.


겉 윗물은 깨끗하게 보여도 그 속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썩은 콩나물도 들어 있고, 고등어대가리도 들어 있고, 쉰밥도 들어 있고, 각종 음식물 쓰레기들이 들어가 있잖아요.


작대기를 들고 그 속을 휘휘 저어 보세요.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 드러나지요.


 


인간의 마음도 이와 같아요.


예수 믿어서 착한 것 같았는데 어떤 상황에 다다르면 자기도 모르게 죄성이 그대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겁니다.


옆에서 신경질을 돋우고 약 올려 보세요.


금방 본색이 드러나요.


 


그러니 성도라 할지라도 천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화론자들은 그래도 마음에 분노를 참고 악함을 참고 절제하는 훈련을 하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자기를 다스리라고 하잖아요.


전 이런 것을 나무라고 싶지 않아요.


성도라면 당연히 성질을 죽이고 살면 좋지요.


 


그러나 이걸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엔 동의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성화론자들은 이걸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하니 화를 내는 겁니다.


 


마인드 콘트롤과 같이 자기 정화(淨化)는 절간에 스님들이 목사들 보다 백번 나아요.


불교 교리는 전부가 악을 버리고 해탈하라는 거잖아요.


반듯한 사람이 되라는 거잖아요.


인간 속에 악을 버리고 선을 장려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점들이에요.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에겐 선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을 해요.


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신앙의 근본으로 깔려 있지 않으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에요.


기독교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겁니다.


우리 독자적으로 의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에 주 예수를 믿게 해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겁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맨 날 정신머리를 자기 변화하는데 두고 자기 치장하는데 두어요.


 


그러니 요란하게 뭔가를 하는데 정작 토해져야 할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안에서 의롭게 된다는 감사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성화를 믿음이고 신앙이라고 말하지 말고 그냥 취미라고 생각하세요.


본인의 성격이 강직하여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청렴결백하게 살겠다는 것을 말리고 싶진 않아요.


 


이건 마치 어떤 사람은 성격이 털털해서 집안을 어지러운 상태로 살고, 어떤 사람은 성격이 까다로워서 집안에 먼지 하나 없이 해 놓고 사는 것과 같아요.


어느 것이 정답이냐?


없어요.


그냥 자기 좋은 대로 살 뿐이에요.


 


여기서 대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전 말씀대로 사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요.


다만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괜히 정낙원 목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고 하더라고 오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제발 말귀를 알아먹으세요.


왜? 성화론 자들을 공격하는지 그 의미를 아시란 말입니다.


 


성화론자들은 성격이 까다로운 류에 속하고, 저는 털털한 편에 속해요.


성격을 가지고 어느 것이 의롭습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되지요.


성격이 깨끗함을 좋아하는 사람도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성격이 지저분한 사람도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아요.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감사하고 내가 그 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해야지 자기 깨끗한 성격으로 산 삶을 자랑해서는 안 되지요.


자기 깨끗한 삶을 자랑하는 것은 신앙도 믿음도 아니에요.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서 의(義)다 불의(不義)다 판단을 하지 우리 삶으로 판단치 않아요.


만약에 우리 삶으로 판단한다면 우리보다 스님들이 천국에 먼저 갑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천국에 갈 확률은 거의 없을 겁니다.


속세를 떠나 맨 날 도 닦는 재미로 사는 사람을 어찌 세속에 찌든 목사가 이기겠어요.


무인도에 살면 깨끗하게 살 수 있어요.


 


사람은 타인과 부대끼면서 자기 안에 죄가 튀어나와요.


 


집안에 혼자 있으면 탐욕이 없어요.


갑자가 TV를 보는데 좋은 옷을 보면 탐욕이 발동해요.


탐욕이 발동하면 자기 결핍을 느끼고 불행해져요.


왜? 나에겐 저런 명품 옷이 없고 명품 가방이 없을까? 자기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져요.


 


그러나 TV도 없는 무인도에나 산속에 스님들처럼 살아보세요.


유유자적하면서 살 수가 있어요.


속세를 떠난다고 해서 속에 있는 탐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건 언제들이 조건만 맞으면 터져 나옵니다.


 


제발 삶과 믿음을 혼동하지 마세요.


분명히 말하지만 인간의 삶엔 의(義)가 없어요.


의(義)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피에서만 나옵니다.


그러니 범사에 예수 믿고 사세요.


 


사람이 자기 성질머리를 죽이고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나도 내가 제어 할 수 없는 이런 죄인임을 알고 이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감사하며 사는 거에요.


자기를 치장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대속에 은혜를 감사하고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어떻게, 장로가 어떻게, 집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래 맞아.


목사라도, 장로라도, 죄성은 사라지지 않아!


이게 우리의 본질이야!


 


그렇기 때문에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우리 모두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거야! 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맨 날 사람들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


말은 알겠는데 막상 이런 일이 닥치면 우린 또 서로 삿대질 하면서 아가가가 합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으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사람에게도 실망하지 않고 환경으로도 낙망치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 받고 구원받은 그 은혜만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아도 죄인들이 할 짓을 다 해요.


욕도 하고, 화도 내고 해요.


우리나라 교통 문화에서 운전을 해보면 자기 악함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와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안에 이런 추악한 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말씀 앞에 서면 늘 상한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팔 복의 현상이 일어나요.


의에 주리고 애통하고 심령이 가난해 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팔복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들이에요.


 


낙심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이 감사해요.


 


그러나 성화주의자들은 팔복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애통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온유해집시다.


긍휼히 여깁시다.


마음이 청결해지도록 합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합시다! 라고 하는 것은 법이에요.


법은 통제가 가능해요.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은 곧 스스로 의를 만들 수가 있고 천국에도 갈 수 있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천국에 주인이신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어야만 갈 수가 있어요.


천국엔 우리가 쳐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의 가능성을 의지해선 안 되지요.


 


천국은 은혜로 가는 곳이에요.


은혜란 우리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겁니다.


우리에 것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요.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라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법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 아니니, 신앙이 아니지요.


법 안에는 내가 있고, 은혜 안엔 내가 없어요.


법 안엔 내가 살아 있고, 은혜 안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그러니 법아래 있는 사람은 항상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설쳐대는 겁니다.


하지만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말씀 앞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으로 사는 겁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은 법아래 있는 자들인 겁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성도를 법으로 옭아매려고 해요.


그래서 신앙생활의 행동규칙을 자꾸만 만드는 겁니다.


 


성경 쓰기 합시다 라든가!


성경 통독 합시다 라든가!


전도 합시다!


기도합시다!


봉사합시다!


서로 사랑합시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라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겁니다.


성화주의자들은 법을 만드는 것은 교인들을 통제해서 자기 수하에 두고자 합니다.


 


바울은 이런 것을 일컬어 법 아래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라고 했어요.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갈라디아 지역에 성화주의자들이 설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보니 배가 아픈 겁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종을 삼고자 꾀는 겁니다.


은혜 안에서 법 안으로 끌어 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들 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떤 놈들이 그런 망발을 하느냐고 대노하였던 것입니다.


자유를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라고 저주를 퍼부은 겁니다.


심지어 바울 자기 자신 조차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빼앗는 말을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법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를 판단하지 않아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판단해요.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자는 용납하지 않아요.


이건 부모고 자식이고 아내이고 남편이고 친구도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의 생명 안에서 있기 때문이에요.


 


어제까지 호형호제 하다가도 십자가 피를 가리면 가차 없어요.


이게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의 특징이에요.


인간의 인정(人情)이 통하지 않는 곳이 십자가 안이에요.


십자가 안은 세상이 아니고 묵시의 나라이기 때문에 세상 인정(人情)이 용납되지 않는 겁니다.


 


묵시의 나라에선 통하는 정(情)은 오로지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정(情)입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이 예수의 사랑으로 살기 때문에 인간적인 조건으로 다툼이 없고 평화로워요.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고 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남녀노소 차별이 없고,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잘나고 못나고의 차이가 없어요.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대학교수라고 해서 똑똑하다고 대접받고, 노숙자라고 해서 무시당하지 않아요.


부자라고 알아주고 가난하다고 멸시 받지 않아요.


목사는 높고 평신도는 낮고 가 없어요.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기 때문에 한 형제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법에 속한 성화 주의자들은 자기에게 잘남이 있으면 가만있지를 못해요.


자랑하고 싶어요.


그래서 남보다 우월해 지고 싶어하는 겁니다.


남보다 잘난 것을 자랑하고 싶은데 알아주지 않으면 짜증이 나요.


 


법 아래선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가요.


내가 한 것만큼 대접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서로가 경쟁하는 겁니다.


상대방 보다 앞서려면 헌금도 많이 해야 하고, 기도도 많이 해야 하고, 충성 봉사도 많이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장로나 권사가 되지 못해요.


평생 시다바리로 있어야 해요.


그러나 돈이라도 한 뭉텅이씩 내어 놓아 보세요.


고속승진해요.


 


법에 속한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각종 기관의 장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피와 땀과 돈을 많이 바쳤다는 증거에요.


이런 것 없으면 상석에 앉기란 불가능해요.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서 당회장 눈에 들어야 부스러기 자리라도 하나 꿰찰 수가 있어요.


 


법의 세계는 냉혹해요.


빈틈을 보였다간 언제 밀려 날지를 몰라요.


상석에 앉아도 안심 할 수가 없어요.


언제 밑에서 치고 올라와 밀어낼지 몰라요.


이러니 얼마나 힘들고 지치겠어요.


이런 신앙생활이 어디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 대한 쉼이 있고 누림이 있겠어요.


없어요.


 


오로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있는 겁니다.


그러니 겉으론 웃어도 속으론 울고 있는 겁니다.


전부 위선이고 연기하는 겁니다.


제가 과거 율법 아래 있으면서 성화주의를 외칠 때가 그랬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성화주의가 이단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내가 십자가 안에 들어가고 보니 성화주의는 십자가 밖에 법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이 보였어요.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보니 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것이 깨달아지니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 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맛보거나 누려보지 못한 안식을 누리고 평안을 맛보게 되었어요.


 


성령은 우리를 반듯하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들을 남기기 위해서 오셨어요.


넌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셨단 말입니다.


넌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오셨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부활신앙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라고 해야겠지요.


 


날마다 자기를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으로 살겠지요.


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그 사람이 부활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지요.


 


바울의 증거를 봅시다.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산다고 하지요.


왜?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삽니까?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다는 것이잖아요.


 


한마디로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 뭐가 됩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자들이지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은 헛 죽은 것이 되요.


이 시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성화주의자들 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성화를 외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원수라는 것을 꿈에도 몰라요.


죄인에게서 착한 삶을 도출해 내고자 하는 것이 죄인 줄 몰라요.


 


예수가 왜? 죽었습니까?


모두가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그럼 예수님을 가장 잘 대우하는게 뭡니까?


이런 죄인을 위해서 대속제물로 죽어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상대적으로 앞으로 열심히 착하게 살게요!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욕하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라면 항상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나와야 해요.


그렇지 않고 자기의 가능성이 나오면 안 돼요.


항상 불가능성이 나와야 해요.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군요! 라고 해야지요.


 


자기의 불가능성을 알기 위해서 말씀대로 삽시다! 라고 하면 이해를 하겠어요.


그럼 성화하자 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성화란 날마다 말씀대로 살아서 점점 더 거룩해지자는 것인데!


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자는 것과는 모순이잖아요.


 


성도의 몸에선 예수의 죽음이 늘 나타나야 해요.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어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이 나와야 해요.


 


그럼 우리 몸에선 항상 뭐가 나타나야 합니까?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들이 나타나야 하겠지요.


이걸 바울은 우리의 육체에게서 예수의 생명의 나타나게 하려 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이것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이걸 갈라디아서에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갈 2:20-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보세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하지요.


내가 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하잖아요.


 


만약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헛되이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뭡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이 힘없이 죽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잖아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맛보아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는 자기백성들을 위해서라고 하잖아요.


 


한낮 미물 같은 우리를 위해서 그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죽었어요.


천사들을 부려야 하는 분이 도리어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오셨어요.


영광의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심판하여야 할 분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했어요.


 


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내시려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맛보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서입니다.


그냥 하늘에서 낚시질 하듯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의 아픔을 몸소 체휼하시기 위해서 죽음을 맛보신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겁니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법 앞에서 당당하게 내어 놓는 것입니다.


 


성도가 지옥에 갈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은 우리 대신 지옥에 갔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가야할 지옥에 예수님이 대신 갔다 온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옥에 가지 않는 겁니다.


 


마귀가 율법 제 몇 조, 몇 항에 의거하여 당신은 죽음에 처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는데요! 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으니 성도는 죽음이 가둘 수가 없어서 부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부디 그리스도의 부활을 위하여 날마다 죽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명을 예수에게 내어 주고 예수의 생명에 내게 덮쳐 와서 내가 아닌 예수 안에서 나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존귀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도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태그 성경강해 투명한오후
댓글내용 
♣(강해)두 증인 (계 11:1-13)
♣(강해) 절망 속에서 주어진 감사와 소망 (롬 7: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