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동네]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
카테고리 : 게재 | 조회수 : 23502013-07-13 오후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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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부터 직접 행동과 실천을

[책]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는 민주공화정이 흔들리는 2013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가슴에 아로새겨 현실 정치에서 이루고 싶은 단어일 것이다. 올해만 아니라 우리는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를 경험했고, 민주선거로 뽑힌 이명박정권도 반민주주의 행보를 보였다. 무엇보다 국가정보원이 부정선거를 통해 정치에 개입했다. 이 모든 것은 인간 본성과 양심을 억압하고 탄압한다.

    "나의 양심은 나의 것, 나의 정의는 나의 것, 나의 자유는 최고의 자유"

    푸르동(Pieer Joseph Proudho)은 "나의 양심은 나의 것이고, 나의 정의는 나의 것이고, 나의 자유는 최고의 자유"라고 했고,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는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천명했다. 사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변화'(변절이 아님)한 고토투 슈스이는 일본군국주의를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애국심이란 국민의 허구와 미신의 결과이며, 애국주의란 야수의 천성이자 미신이요, 광란이자 허구이며, 호전적인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를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로 보아 함께 부정했고, 세계주의에 기초해 민족과 조국을 초월한 보편적 인류애를 강조했다."-'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29' 조세현의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28쪽)

    이들 말을 종합하면 인간 자체를 지독히 사랑하고, 체제와 구조,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2013년 대한민국은 인간 자체를 존중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권력을 사유화하는 일까지 범하고 있다. 국가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 주장과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인간 자유와 양심을 지독히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당연한'것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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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
    ⓒ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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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우리는 "나의 양심은 나의 것이고, 나의 정의는 나의 것이고, 나의 자유는 최고의 자유"를 꿈꾼 푸르동이 바란 세상을 이룰 수 없을까?

    "아나키스트의 저항 전선과 연합 전선은 모든 형태의 폭력적 억압을 거부하고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나아가 상호부조와 협동을 통해서 자주 관리, 자치 질서, 자율 선택의 아나키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의 반폭력주의와 협동주의는 국가권력과 충돌하고 자본 논리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7쪽)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이학사)는 한국아나키즘학회가 주도한 아나키스트 협동 작업의 첫 작품으로, 한국 사회를 향한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 열넷 사람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아나키스트, 반폭력주와 협동주의

    우리는 아나키스트를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견고한 나라는 더더욱 그렇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논쟁에서도 드러났듯이 모두가 '국익' 우선이다. 노무현을 비판하는 자들은 국익을 저버렸다 하고, 노무현이 NLL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반박하는 이들은 국익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노무현 발언 속에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바로 '평화'다. 평화는 내 편 네 편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고, 폭력을 거부한다. 이를 확대시키면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거부하면서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가는 인류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노무현은 여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는 지금 당장 전 인류가 평화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 출발해보자고 제안한다. 아나키스트가 시대착오적인 공허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에 적용 가능하며, 작은 목표일지라도 현실 개선을 위한 구체적 대안을 준비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아나키스트 경제', '아나키스트 정치', '자유 공동체와 통일 문제', '민주주의의 급진적 확장으로서의 아나키즘', '공동체 운동과 아나키즘', '지역 통화 운동', '장애인 노동' 등 다양한 주제와 분야에서 아나키즘의 사유와 원리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NLL를 평화지역으로 만들려고 했던 노무현도 거대재벌의 폭력과 압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재벌은 이제 '00공화국', '00제국'이란 이름처럼 공화정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 논란이 되는 '갑을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10%대 90%를 넘어, 1%대 99%대 사회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계급'을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신계급사회'에 발을 내딛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이같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양극화란 중병을 앓고 있다.

    '신계급사회' 진입한 한국사회...반권력과 자유해방을 위해

    김성국은 '한국 경제를 위한 아나키스트 대안'에서 "오늘의 한국 경제를 '중병을 앓으면서도 아직 괜찮다고 믿는 환자로' 규정"한다. 한국 경제 올바른 회생을 위해 그는 세 가지 아나키스트 처방을 내린다.

    "일자리 나누기, 권력형 부정부패 청산, 탈물질주의의 생활화다. 이 처방들은 상호부조의 협동의 원리, 강제와 폭력을 거부하는 반권력의 원칙, 자유해방을 위한 자기 조직이라는 아나키시트 원칙에서 도출한 것이다."(26쪽)

    한국 사회가 신계급 사회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지금 같은 양극화가 지속되면 어떤 상황으로 치닫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일자리를 나누고, 권력형 부정부패 청산과 탈물질주의 생활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열어주는 길이다. 문제는 기득권 최정점에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견고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함께 살자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반권력과 자유해방으로 나아가자는 김성국 호소가 왠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그럼 자포자기할 것인가? 아니다. 강동권은 '아나키스트 정치 구상'에서 "우리가 '아나키스트 정치'를 통해 '모든 폭력과 강압으로부터 해방된 자율적인 인간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공동체'인 '아나키스트 사회'를 만들어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방법은 '직접행동'이다.

    "아나키즘의 이념은 직접행동을 통해 표출되고 실천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도시 광장의 공론장과 인터넷 공론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고 서로 피드백이 이루어지면서 시민 참여의 직접행동의 장이 지속적으로 열리며 확대되고 있다. 아나키즘은 직접행동을 통해 이론과 실천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혁명과 혁신을 현장에서 만들어온 오랜 전통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아나키스트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스트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나키즘의 오랜 전통인 직접행동이 필요하다."(67쪽)

    "지금, 여기"에서부터 직접행동과 실천을

    그렇다. 민중이 직접 나서야 한다. 양심과 정의 그리고 자유를 가진 민중이 직접 나서야 한다. 원래 국가와 권력은 민중이 양심과 정의, 자유를 꿈꾸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국가에 반하는 것이라면 탄압한다. 독재정권만 아니라 민주정권도 차이만 있을뿐, 국가라는 존재 자체가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이 직접행동하지 않으면 국가와 권력은 변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특히 2013년 7월 현재 대한민국 인민들은 직접행동을 통해서만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음을, 양심과 정의와 자유를 지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NLL은 피로 지켜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로 지키는 NLL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이 제안한 것이 절대진리는 아니지만, 그가 추구했던 '평화'는 분명 이명박과 박근혜 그리고 이 땅의 반공세력을 지배하는 '반공주의'와는 다르다. 한반도 통일에도 아나키스트 정신이 필요함을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는 말한다.

    통일은 민중을 위한, 민중 스스로가 주체

    이문창은 '분단 시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과 자유공동체'에서 "분단 체제로 인해 정치적 부자유, 경제적 불평등의 억눌림 속에서 사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남북의 풀뿌리 민중에게 '자유공동체 운동'"이 대안임을 제시한다.

    "통일은 당연히 처음부터 이 땅을 지켜온 민중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따라서 통일을 되찾는 사업 또한 앞으로도 이 강산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할 우리 민중 스스로 몫이라는 데 대한 깊은 통찰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중략) 내 운명의 조타수는 바로 나뿐이라는 데 대한 민중의 깊은 자각이 요구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서도 존재한다. 지금이야말로 민중이 민중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이 땅의 주인 자리를 되찾느냐 영원히 노예의 쇠사슬에 묶여 지낼 것이냐의 분기점임을 맹성해야 할 때다."(129쪽)

    이문창이 제안한 '자유공동체 운동'을 통한 통일은 생경하다. 그러나 읽어보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민중이 통일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땅의 주인은 바로 민중이기 때문이다. 조국 해방 이후 민중은 이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NLL논란을 보라. 거기에는 민중이 없다. 민중이 나서서 통일을 이룰 때 영원한 노예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같은 통일은 국익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이겠지만, 지향해야 할 통일방식이다.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는 '지역공동체를 살리는 지역 통화' 에서 "지역 통화는 자본주의의 취약점인 인플레이션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막을 수 있다"면서 자본주의 경제 문제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지역통화를 제시한다. 또 "장애인을 발생시킨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무한 경쟁을 통한 착취와 억압의 구조적 모순의 위기를 탈중심적인 공동체연합, 국가주의의 거부, 직접민주주의, 자유주의적 공동체 사회 건설 따위"를 '아나키즘의 기본 이념을 통해 극복하자고 제안하는 정중규의 '장애인 노동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같은 글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작은 실천을 할 때 우리는 "나의 양심은 나의 것이고, 나의 정의는 나의 것이고, 나의 자유는 최고의 자유"가 실현되는 '자유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이상주의인가? 도전도 하기 전에 포기하기에는 2013년 7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인간의 자유와 양심 그리고 정의가 너무 착취당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 김성국 이문창 강동권 정중규 외 10명 지음 | 이학사 펴냄 ㅣ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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