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텃밭
카테고리 : 松竹♡수필 | 조회수 : 1082021-10-25 오전 9:41:00

어머니의 텃밭

 

                                                                         김철이

 

 내 나이 열여덟 되든 해 대한민국 정식 문학 작가로 입문하던 날, 어머니 날 보고 훗날 기회가 난다면 나의 글 자락 한 귀퉁이에 한(恨) 많고 원(怨) 많은 당신 인생을 몇 자 써주지 않겠냐고 하셨는데 자식 된 처지에서 시절 탓에 가정환경 탓에, 고개가 절로 내저어질 정도로 지독한 아픔을 겪어야 했던 모친 고생담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한 획 한 획 써 내려갈 때마다 가슴이 아려서 눈물이 범벅될 텐데 어머니 고생하신 세월을 누구보다 많이 보고 들었던 처지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어머니 고생담을 쓰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살다 가신 한 생애 십 분의 칠 세월을 살고 보니 어렴풋이 어머니 앓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많이 늦었고 갖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던 인생 팔십여 년을 몇 마디 필설(筆舌)로 표현해낸다는 것이 큰 모순일 테지만 인생 텃밭 고랑마다 눈물 포기 심으며 사신 어머니 영전에 양해와 용서를 청하며 천만 분의 일도 들춰내지 못할 모친 고생담(苦生談)을 이제야 펼쳐보려 한다.

 

 어머니의 가슴속 슬픈 텃밭에는 포기마다 아물 했던 역사적 배경이 늘 수복이 자라있었다.

 옛 어른들은 밥상머리에서 아이들이 밥을 먹다 말 한마디라도 할 양이면 들어오던 복이 달아난다며 꾸짖기가 일쑤였지만, 평생 신여성 시대를 부르짖으셨던 어머니는 밥상머리 대화법은 무척이나 개방적이었다.

 아버지도 비교적 개방적인 성품을 지니셨지만, 고조부님의 엄격하신 훈도 탓에 가끔 어린 삼 남매가 떠들 양이면 엄한 말투로 조용히 꾸짖곤 하셨는데 어머니는 이럴 때마다 식사 후 아버지 몰래 아이들을 부엌으로 불러 아버지의 속마음과 본심을 삼 남매 마음속에 아로새기며 곱게도 타일러 주셨지.

 

 자손 대대로 후손이 귀했고 여인네들의 수명이 짧았던 가문의 이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여덟 살 때 모친을 여의고 편부슬하에서 다섯 살 아래인 남동생과 어렵게 성장하셨던 아버지의 어깨에는 이중고의 짐이 지워져 있었다.

 큰 종조부님과 큰 종조모님의 슬하에 구 남매의 자녀를 두었는데 일곱은 어릴 때 요절하고 장녀인 종고모님과 늦둥이인 당숙님이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기르셨는데 내 부모님이 부부의 연을 맺을 당시 내 오촌 당숙의 나이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아 내 어머니를 본인의 어미인 양 따랐으며 당신의 친부(親父)인 큰 종조부님을 “할배” 친모(親母)인 큰 종조모님을 “할매”라고 불렀다는 웃지 못할 일화를 전해 들은 바 있듯이 그 당시만 하여도 당숙이 잘못될 거라 여겨 내 부친은 백부, 백모 슬하 양자 살이 하게 되어 있었다. 이 덕분에 나의 모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선택의 여지도 없이 젖먹이 맏아들 등에 업은 채 느려 빠진 열차를 타고 한 달이면 몇 차례 44km 부산과 울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양가 시집살이를 하셨다.

 

 그 시절 양가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드셨던지 보리쌀 삶아 저녁밥 지을 채비를 할 때면 친정집이 있는 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남몰래 행주치마에 눈물 훔치기가 예사였단다.

 일제가 두 눈 시뻘겋게 감시했던 일제 강점기 때도 한 끼니도 잡곡밥을 먹지 않았는데 젖먹이 첫아들을 등에 업은 채 농번기 농사일을 도우려 시백부(媤伯父) 댁엘 가니 끼니때마다 감자밥을 먹어야 하니 아무리 마음을 다져도 밥술이 입으로 올라가지 않더라는 거였다.

 시백부는 밥상 위에서 쌀밥을 드셨고 시백모(媤伯母)와 내 모친은 밥상 밑에서 감자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단다.

 끄적거리는 어머니 표정을 눈치챈 종조부(從祖父)께서 아내가 볼일로 잠시 부엌에 나갈 양이면 당신 밥그릇의 쌀밥을 얼른 들어다 어머니 밥 양푼에 옮겨 감자밥으로 덮어 놓고 질부(姪婦)가 먹던 감자밥은 당신의 쌀밥 그릇에 옮겨 쌀밥으로 덮어 은폐하셨단다. 그 시절 시백모의 호된 시집살이를 견디어낼 수 있었던 건 시백부의 따뜻한 마음씨 덕분이었노라고 내 모친은 지난날을 회고하시며 슬하의 자녀들 귓전에 누구에게나 따뜻한 마음씨 아끼지 말라셨다.

 

 그 시절 비교적 부유한 가문의 사 남 일여 중 고명딸로 태어나 손에 물 묻힐 일 드물게 자라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죄목으로 일제 강점기 마수를 피하려 시집이라고 와보니 기다리는 건 팍팍한 살림살이에 고초 당초보다 더 매운 양가 시집살이라 칠십 평생을 살고 가신 어머니의 삶터 텃밭에는 눈물 말고는 더 심을 게 없었다고 고백하셨다.

 분명 시대를 잘못 타고 나신 거겠지.

 가끔은 가슴속에 딱지, 딱지 앉은 아픔의 상처를 노래로 풀어내곤 하셨는데, 한 시절 모 방송국 전속 가수셨던 내 부친의 말씀에 의하면 내 모친의 노래 실력이 가수의 길을 걸어도 하나 손색이 없을 거라 하셨다.

 노래하실 때마다 눈가에 촉촉이 이슬이 맺혔고 단아한 모습에서 가슴 깊은 곳의 한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 살아생전 천하에 둘도 없을 이 불효자식의 본심을 눈치나 챘는지 몰라도 노래를 누구보다 좋아하면서도 내 모친의 노래가 한 소절 시작이 되면 유년 시절 나는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내 모친의 슬퍼하시는 표정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너그럽고 단화 하셨던 부모님 슬하에서 부족한 것 없는 생활을 하며 조선 식량 관리령이 내려져 있던 일제 강점기 때도 한 끼니의 잡곡밥을 먹지 않았는데 일본 국가가 저지른 성 노예화 범죄 동서고금(東西古今)에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세계 최고의 악법(惡法)인 일본군 성노예제도(日本軍 性奴?制度)의 희생양이 되기 싫어 도망치듯 가난한 가문의 맏며느리로 시집살이를 자청하셨지만, 부산 범일동 안창마을 다섯 칸짜리 적산가옥 단칸방에서 홀시아버지와 혼전 시동생을 거느린 시집살이는 단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혼인한 지 두 달여 만에 일제 강제 동원령에 의해 남편을 강제노역에 빼앗겨야 했다.

 첫아들을 가진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일본으로 떠난 이후 소식 한 장 없으니 죄다 죽었다고 포기했고 며느리의 처지를 측은히 여긴 친조부(親祖父)님은 청춘에 홀로 된 며느리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외조부(外祖父)님은 출가외인이니 죽으나 사나 김씨 가문의 귀신이 돼야 한다는 실랑이가 오고 갈 즈음 아비도 보지 못한 상황에서 태어난 첫아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었으며 무의식중 첫아들의 걸음마를 보고 싶은 부친의 열망(熱望)이 하늘에 닿았든지 타지로 끌려간 남편이 일여 년 만에 거미가 된 채 구사일생 살아왔다.

 말이 쉬워 산 사람이지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남편의 병구완 하느라 고스란히 이 년여 세월을 소진하셨다.

 

 요즈음 같으면 부모님 슬하에서 뒷바라지 받아가며 응석받이로 공부나 할 나이에 홀시아버지, 혼전 시동생 건사하기도 벅찼을 텐데 다섯 칸 집 적산가옥 실소유자인 재종조부(再從祖父)께서 같은 지붕 아래서 생활하셨는데 이 할아버지 슬하에 무남독녀(無男獨女)를 두셨고 이 재종(再從)고모가 부녀간(父女間)의 불화로 집을 나간 이후 어머니가 시집온 이후로도 소식이 두절이었다.

 이 탓에, 훗날 시부(媤父)는 병구완은커녕 대소변 한번 받아 드리지 못한 채 이승의 영원한 이별을 했는데 시종숙(媤從叔)은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삼 년여에 걸쳐 갖은 병구완을 해야만 했단다.

 이뿐 아니라 슬하에 아들자식이 없는 시종숙(媤從叔) 네 분이 계셨는데 이 어른들께는 딸자식은 여럿이라 이재종 시누이들의 뒷바라지 또한, 어머니 몫이었다.

 내 기억에도 생생한 건 고향인 울산 호계에서 내려와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직장생활 했던 재종고모(再從姑母)들의 갖은 뒤치다꺼리로 몹시도 힘겨워하시던 모습이다.

 

 막상 닥쳐본 시집살이는 문학소녀가 꿈이었던 가슴속에 점차 피멍이 들어갔다.

 열여덟에 첫아들을 낳았으나, 품고 젖 먹일 때 말고는 당신 자식이라 진정 귀하게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어른들 소설을 인용한다면 태어나는 아기의 건강과 재산 등 가정의 모든 길흉을 관장한다는 조왕대신(?王大神)의 심술로 홍역 중 세 돌이 오기 전에 용광로 부나비처럼 보내야 했고 스물둘에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첫돌이 되기 전에 병명이 확실치 않은 병마에 잃어야만 했는데, 젖먹이를 보내고 나니 퉁퉁 붓는 젖가슴을 부여안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속울음만 울어야 했단다.

 자격지심에 자식 잡아먹은 어미라는 손가락질할까 봐, 부끄러워 상처 난 가슴에 왕소금을 뿌린 듯한 심정에 미물만 한 위로가 된 것은 시부(媤父)의 위로와 사랑이었다.

 하나도 무서운 일인데 손자 자식을 둘씩이나 잃은 것은 죄다 당신의 죄(罪)자 부덕(不德)이라 하셨단다.

 

 셋째 손자 입덧이 시작될 무렵 세상을 뜨신 시부(媤父)는 며느리 폐를 끼칠 것을 두려워하셨든지 며느리 손에 대소변 한번 받게 하지 않았고 죽 한 술 받아 드시지 않았단다.

 너무 깔끔히 가신 탓에 어머니 마음속에 아쉬움만 가득했단다.

 

 셋째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첫째와 둘째 아들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듯했으나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듯 잠시의 행복을 느낄 무렵 넷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이 그리도 심했든지 넷째 아들은 태어난 지 삼 주 만에 신(神)의 능력 외는 치유가 힘든 장애를 지니게 되었고,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끌어모아 부랴부랴 서둘렀으나 별 차도를 보이지 않자 십팔 년간 병마와의 사투 끝에 지친 나머지 잠시 휴전을 선언하신 어머니 세상 누가 됐든 당신 아들이 남의 도움 받지 않고 먹다 반은 흘려도 좋으니 제 손으로 밥술 뜨고 절든 뛰든 제 발로 걸어 화장실 출입만 제대로 할 수 있게 해놓고 손을 벌리면 백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달라는 대로 다 주겠다는 공언(公言)을 하셨다.

 

 처지가 다급한 사람들 앞에는 통시에 구더기 끓듯 사기꾼 협잡꾼이 꼬이기 마련인데 어머니 주변엔 넷째 아들의 장애 치유 명목으로 적지 않은 검은 마수가 뻗쳐왔다.

 모친의 심장에 뺄 수 없는 대못이 된 불효자식 그 불명예를 벗을 길 묘연하지만, 하늘 계신 어머니께 매 순간 감사의 묵례(默禮)를 올린다.

 몸에 지닌 장애는 나이가 드니 모든 근육 조직(筋肉 組織)과 세포 조직(細胞 組織)은 이미 쇠퇴기(衰退期)에 이르렀으나 어머니 물려주신 불의(不義) 향한 곧은 절개(節介)는 결코, 굽히지 않으리라는 약속드리며 한 많고 원 많은 현세(現世)에서 고생 말고는 하신 것이 없으신 내 어머니, 저승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하늘나라 내 어머니의 텃밭 고랑마다 행복의 씨앗을 뿌려 다복의 열매 맺어 철철이 시들지 않기를 조과(早課), 만과(晩課)에 혼을 묻어 축원(祝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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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고운 나의 생을 위하여
내 이름 석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