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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찾아서...
카테고리 : 나는... | 조회수 : 83062009-07-27 오후 4:20:00


저는 직장을 다니며 가끔 취미로 암벽등반과 스킨스쿠버를 즐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해서 누구보다 더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평범하고 건강하기에 때가 되면 좋은 사람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아서 크면 같이 스킨스쿠버도 즐기는...그런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치 않은 사고로 평범했던 제 삶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며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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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에 취미로 즐겼던 스킨스쿠버와 암벽등반

1999년 1월18일 밤늦은 퇴근길, 회사동료차를 타고 회사 정문을 나선지 채 5분도 되지 않은 급커브 길에 커브를 틀지 못해 차가 전복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목을 다쳐 목 이하로 내려오는 신경이 끊기는 사고로 그만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고는 과중한 업무로 피로가 쌓인 동료운전자의 졸음운전 때문이었습니다.

설상가상, 회사동료는 자동차보험을 종합보험이 아닌 책임보험만 들어 있었고, 회사에서도 퇴근길 교통사고는 산재보험적용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1년여의 병원생활을 하고 저에게 남겨진 것은 혼자서는 밀 수 도 없는 휠체어 한대와 목 신경 손상으로 인한 전신마비장판정의 장애인등록증이었고, 퇴원 후 저는 중증의 장애와 경제난이라는 이중고에 부딪치며, 이 사회에서 중증의 장애인으로 살기위해 치열한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고당시 차가 전복이 되면서 어딘가에 목을 부딪쳤고, 그 순간 목뼈가 으스러지며, 목 이하로 내려오는 신경의 손상으로 손과 발이 마비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 소변 기능도 마비되어 소변이 차면 방광에 넬라톤이라는 줄을 집어넣어 소변을 강제(?)로 빼내야 했고, 대변 또한 3일에 한번 관장약을 써 침대에 누워 봐야하며, 그 모든 것을 연로하신 부모님이 다 해주셔야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한 복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욕창이었습니다. 어깨 아래로는 감각이 전혀 없다보니 한 자세로 오래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오래 않아있으면 눌려있는 부위에 피가 통하지 않아 살이 괴사하면서 천천히 썩어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썩어 들어가도 마비된 감각으로 인해 통증을 느끼지 못하다보니 중증장애인이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경우 중 1순위가 심한 욕창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고당시 저는 27살이었습니다.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물 한모금도 마실 수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장애의 특성은 정신은 멀쩡하고, 별다른 통증도 없는데 전신이 마비되어 있다 보니 가벼운 종이 한 장 드는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퇴원 후 2년 가까이 침대에 누워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다보니 아침에 눈을 뜨면 tv를 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밤늦게 tv를 끄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했고, 그렇게 2년 가까이를 살다보니 서서히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정말로 무의미한 인생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 창살 없는 감옥의 독방에 갇혀 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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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전신마비장애인이 된 필자

 

그 이후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감옥과도 같은 독방(?)을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저 창문 밖의 많은 사람들은 자유스럽게 자기의 생활을 누리면서 직장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가고 싶은 곳도 다니며 먹고 싶은 음식도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나눌 수 있는 그런 평범함을 즐기지만, 저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조금씩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장애인이 된 후 장애인복지나 혜택이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아볼 곳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조건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에 시청과 보건소에 연락하여 자원봉사자 연결을 몇 차례 부탁하였지만 "알았으니 기다려보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시간은 지나갔지만 아무 연락도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컴퓨터를 구입하게 되면서 인터넷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은 그 전까지 알지 못했던 장애관련정보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나라가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경제 성장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의 복지 관련 서적을 구입해서 보고, 장애관련 복지와 역사는 인터넷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조금 공부를 하게 되면서 "내가 전신마비라는 중증의 장애로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많은 장애관련 기관에 중증의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문의를 하였지만 대부분 아직까지는 저와 같은 중증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말과 함께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보니 딱히 도움이 될 만한 지원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장애관련 단체나 장애관련 서비스가 주로 서울시에 집중되어 있어 지방인 이천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어떠한 활동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생각 끝에 서울로 올라가야겠다고 결심하여 2001년 2월, 서울 수유리 국립재활원에 재활 치료로 입원 신청을 하고, 그해 4월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재활치료를 받고 오후에는 장애인 단체를 찾아다니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다시 장애인 단체를 직접 찾아가 상담을 하였고,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주관, 서울시의 후원으로 서울시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장애인의 올바른 인식 전환을 위한 일일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용인즉 매주 토요일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3교시 수업을 진행하며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 장애체험, 체험 후 토론식으로 진행을 하였습니다. 장애인식개선 교육은 4개월여 동안 서울시 11개 초등학교가 참여를 하여 장애인의 올바른 인식개선에 대한 많은 성과를 얻어 자료집으로 엮어 전국 초등학교에 배포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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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정범진판사, 이상묵교수, 왕태윤대표, 박경석선생님


그밖에도 장애인의상연구소 주관, 서울시 후원으로 장애인 패션쇼도 참가하기도 하고 그와 관련된 크고 작은 장애관련 행사에 많이 참가를 하였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장애인이동권연대와 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진행 중 인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세미나를 접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드디어 찾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은 중증장애인도 사회로 나와 일을 하며 사는 선진국의 자립생활제도를 배우고 우리나라에서도 비장애인과 같이 평범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참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라는 중증장애인 모임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저는 자립생활 홍보담당을 맞아서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알리기 위해서 논문을 찾아 자료를 만들어 장애인 정책담당자를 만나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필요성을 알리려 노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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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이동권연대, 패션쑈, 중증장애인 서바이벌대회 

그러나 국립재활원의 정해진 입원기간 때문에 퇴소하면서 다시 이천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고 경제적 어려움과 지방의 특성상 다시 활동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의지가 있다 하여도 전신마비라는 장애는 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높은 벽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더 많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포기를 한다면 평생을 다시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방에서 절망과 후회를 하며 지낸다는 것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나가서 활동을 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나의 활동을 보조해줄 수 있는 활동보조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중증장애인의 활동보조서비스의 개념과 지원이 안 되어 있는 상황이라서 저의 활동을 도와 줄 분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간병인협회에서 간병인을 고용하여야 하는데 한 달에 150만원이란 비용은 저에게는 엄두도 내지 못할 비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또다시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보건복지부에 중증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비도 알아보고, 전경련에 연락하여 상무님도 만나보고, 시청에 지역사회 후원도 알아보고, 여기저기 장애인단체에 문의도 해보고, 시민단체에 호소도 해보았지만 후원과 기부문화의 부재 속에서 먹고 사는 문제도 아닌 단지 사회활동의 필요성만으로는 힘들고, 또한 개인에게는 직접지원이 어렵다는 말과 함께 어떤 사람은 “그런 중증의 장애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냥 집에서 요양하다보면 좋은날이 올 것이니 편하게(?)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사회로 나가기위해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지만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다시 고심 끝에 스스로 벌어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보험업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사고 전 서울에서 2년여 간의 영업활동도 해보았고 보험이란 대중화된 상품에 무형의 상품이라서 어느 정도 교육을 통한 지식만 갖춘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생겼고, 내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다보니 누구보다 더 보험의 중요성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만들어 무턱대고 보험영업소에 전화해 소장님을 만나 “다른 직원들과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일 할 테니 저에게 한번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부탁드렸지만 소장님은 검토 후 연락을 주기로 하였으나 기다려도 연락이 없자 다시 찾아가기를 반복하고, 반복해 드디어 11월에 수원 보험연수원에서 2주의 교육과 자격시험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정말 뛸(?)듯이 기뻤습니다. 비록 시작도 하지 않은 일이지만 기회를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습니다. 수원을 왕래하면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차도 있어야하고 활동보조인도 당장에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 라고 했던가! 1년 전에 한 장애인 모임에서 만난분이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 미인가 장애인시설에서 생활교사로 근무하다가 대학원 사회복지 공부로 인해 잠시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사정을 전하고 많지는 않지만 월급의 일정부분을 드리는 조건으로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분은 잠시 고민 끝에 허락하였고, 그렇게 직업을 찾아 사회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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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사진, 사무실

2003년 12월, 사고 후 거의 5년 만에 중증장애로 다시 직업을 같게 되었고, 2004년 1월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온 몸이 꽁꽁 얼면서도 고객을 만나러 다녔고, 전신마비장애로 어깨 아래로는 땀이 나지 않아 체온이 쉽게 올라가 수시로 일사병을 느끼면서도 고객을 만났습니다.

그러기를 2009년, 어느새 6년째가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활동보조인이 필요했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영업을 하다 보니 계단이 있는 곳은 올라가지도 못했고, 무리해서 일하다가 욕창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고, 활동보조인에게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것도 없었지만 매달 매달을 최선을 다해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끔 너무 힘들고 지칠 때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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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이 흐른 시간...

 

아직까지는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의 직업적 자립이 성공한 것도 아니지만. 저는 그 대신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돈을 주어야지만 직장을 다니고,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사회에서 전신마비의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주어진 삶을 포기하고, 평생을 방안에서 산다는 것은 더욱 더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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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시복지관, 삼육대학교, 오산중학교에서 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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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교부장관상, 국가기록원상, 다음 블로그기자상, 장애인먼저실천상 


요즘 어려운 경제로 인해 장애인뿐 만아니라 비장애인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저는 좋아하는 산이 있어도 오르지 못하고, 좋아하는 바다가 있어도 수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증의 장애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는 것 또한 저에게는 그저 꿈과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방안에 누워 tv로만 봐야할지도 모르는 산과 바다를 이제는 보고 싶을 때 나가서 볼 수 있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찾아 서로 사는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떠는 사소한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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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만나 본 유명인


 행복은 고난 뒤에 숨어있다고 누가 말하더군요. 지금의 고민과 갈등, 그로인한 고난은 여러분이 앞으로 찾고 싶은 행복을 갖기 위한 과정이라고, 요즘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저 같은 사람도 이렇게 살고 있다고, 건강하고 평범한 하루의 일상도 정말로 소중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글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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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가운 사람들

 

 여러분의 오늘 하루도 소중하고 행복한 하루이기를 바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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